"도전하라"...제주 청년의 꿈, 미국서 '성공 신화'
"도전하라"...제주 청년의 꿈, 미국서 '성공 신화'
  • 부남철 기자
  • 승인 2018.10.28 1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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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종실 남가주 제주도민회 고문
‘2018 재외제주도민 향토학교 임원반’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 땅 제주를 찾은 이종실 남가주 제주도민회 고문이 지난 11일 제주도인재개발원에서 도내 청년들에게 도전을 당부하며 환하게 웃어 보이고 있다. 현대성 기자

20대 후반 정든 고향을 떠나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낯선 땅 미국으로 향한 젊은이가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도착한 그 청년은 젊다는 밑천 하나로 힘겨운 시간을 견뎌냈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서 고향 제주의 가치를 지키는 한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자천타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그 청년은 고향을 잊지 못 하고 있고 자녀들과 후배들에게 ‘제주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낯선 땅, 타인의 땅에서 기업을 일구고 고향 제주의 발전을 기원하고 응원하는 이종실 남가주 제주도민회 고문(68)은 ‘글로벌 제주인’으로서 제주 청년들의 도전을 당부하고 있다. 지난 11일 ‘2018 재외제주도민 향토학교 임원반’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을 찾은 이 고문을 제주도 인재개발원에서 만났다.

▲제주 청년의 도전=이 고문이 미국으로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도전이었다. 이 고문은 군대를 제대하고 당시 파라다이스 투자개발의 카지노 딜러 공채에 응시해 제주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합격해 입사했다. 서귀포관광호텔에서 딜러 생활을 하던 그는 아프리카 지사 설립 요원으로 뽑혀 근무를 하다가 귀국을 한 후 워커힐 호텔에서 근무를 했다. 하지만 제주 청년의 ‘꿈’은 국내가 아닌 외국을 향했다. 안정됐던 워커힐에서의 근무를 그만두고 미국행을 택했다. 이 고문은 미국행에 대해 “아프리카를 갔다오고 나서 귀국을 하니 우리나라가 답답하게 생각됐고 고민 끝에 미국행을 택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생활반경은 이곳이었지만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른 바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라며 “미국에 전혀 연고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을 택한 것은 도전이었고 ‘드림’에 대한 기준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 꿈을 이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2월 열린 재미 남가주 제주도민회 정기총회 및 회장 이취임식 모습. <재미 남가주 제주도민회 제공>

▲‘꿈은 이루어진다’=이 고문은 꿈을 이뤘다고 했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다. 이 고문은 “지금은 외국에 나가는 것이 무척 쉽지만 당시는 외국에 간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고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간다는 것은 도전이었지만 그 길을 택했다”라며 미국 정착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이 고문은 회사 동료가 미국행을 권유했고 과감히 미국으로 떠났다. 1981년 미국 뉴욕으로 입국한 그는 특별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 하다가 파라다이스 투자개발과의 인연으로 마이애미 지사에서 딜러로 근무를 했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그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 콜로라도주 덴버로 향했다. 당시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청소, 봉제공장, 주유소였고 한국에서 돈 좀 갖고 간 사람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정도였다. 이 고문은 덴버에서 그 곳 한인회장과 인연을 맺게 되고 이를 통해 덴버 공항 청소 일을 맡게 된다. 이후 미국 영주권을 얻게 된 이 고문은 LA로 자리를 옮긴다. 이 고문은 “오클랜드에서 일을 하다가 LA로 옮겨 다양한 일을 하다가 집사람을 만나게 됐고 미국와서 일이라도 많이 해봤다는 이야기나 들어보자라는 생각에 많은 일을 했다”라며 ”“그 과정에서 한인신문에서 영자광고가 났는데 가구점 점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을 했고 취업이 됐는데 그것이 인생이 전환점이었다”라고 밝혔다. 이 고문은 취업 이후 1년 만에 매니저가 됐고 1986년에는 자신의 가게를 갖게 된다. 이를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딴 찰스 화인 퍼니처(Chales Fine Furniture)를 열게 된다. 이 고문은 이후 매출 100억원 규모의 업체로 성장을 시킨다. 이 고문은 이와 같은 성공 비결에 대해 “특별한 비법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직원들을 믿고 맡겼기 때문이었다”라고 밝혔다. 한국인을 고용해야 한다는 편견을 깨고 백인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그들에게 자유와 책임을 줬고 그것은 사업의 성공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언제나 가슴 속에 있다=이 고문에게 미국 이주 이후 고향 제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물었다. 이 고문은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 사람과 교류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우리나라 위상이 높아지면서 고국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진다”라며 “이런 점 때문에 우리나라와 제주에 대한 사랑은 늘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제주에서 향토학교 등 해외 도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더욱 활성화됐으면 한다”라며 “제 아이들이 대학교 때 향토학교에 참여했었는데 아직도 그 때를 잊지 못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런 교육 프로그램 등 해외 도민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 고문은 제주 청년들에게 “인생의 묘미는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며 이루지 못한 꿈보다 시도해보지 않은 후회가 더 크다”라며 “좋아 하는 것 또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망설이지 말고 바로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이 고문은 제주시 화북동 출신으로 1988년 1월 29일 강문향 초대회장을 중심으로 창설된 재미 남가주 제주특별자치도민회 6대 회장을 지냈으며 부인 김경애씨(65)와 사이에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장녀인 이미아씨(33)는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UC Irvine)에서 임상교수 겸 산부인과 의사로 재직 중이며 아들인 이혁씨(31)는 대형 로펌 Proskawer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부남철 기자  bunc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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