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 사후, 귀금 중앙 진출 ‘제주 의술’ 전통 이어나가
장덕 사후, 귀금 중앙 진출 ‘제주 의술’ 전통 이어나가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10.1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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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의 첫 의사와 여의사(7)
‘동의보감’ 잡병편 권9, 해독 항의 고독 관련 부분의 기록.
‘동의보감’ 잡병편 권9, 해독 항의 고독 관련 부분의 기록.

장덕이 성종 19(1488) 이전에 세상을 뜨자, 중앙정부는 장덕을 대신할 의료 인력을 제주에서 찾고자 부심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제주의 의사가 장덕처럼 전국의 여느 곳 의사에 비해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병증 치료에 뛰어났던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귀금(貴今)이 장덕을 대신할 의사로 발탁됐다. 한편 장덕의 의술은 중앙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의술의 전수는 만만치가 않은 일이었다.

장덕 사후 국왕 성종이 동왕 19(1488)에 제주목사 허희에게 그녀를 대신할 의사를 제주에서 찾아내 보내라고 급전을 보냈다. 이로부터 4년이 지난 성종 23(1492)에 이르러서는 귀금이 이미 여의 곧 혜민서의 의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애초 그녀는 장덕으로부터 의술을 전수·교습 받았다. 장덕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여종으로 거느렸던 귀금을 제자로 삼은 뒤 의술을 전수해줬던 것이다. 귀금은 장덕으로부터 일곱 살 때부터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중앙정부가 장덕을 대신할 의료 인력을 제주에서 찾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지 4년 뒤 혜민서의 의녀가 됐음이 처음 드러난다. 곧 귀금은 제주에서 장덕으로부터 의술을 교습 받은 뒤 의사로 활동하던 가운데 장덕을 대신할 의사로 발탁돼 중앙정부의 의료계에 나아갔다고 하겠다.

통상 혜민서의 의녀는 관비와 같은 천민층에서 충당되고 또한 그 신분이 그대로 유지됐다. 반면 귀금은 혜민서의 의녀로 발탁되면서 면천도 같이 이뤄졌다. 귀금의 면천은 중앙정부가 장덕의 제자라서 베푼 특별대우였다고 하겠다. 여기에서도 장덕이 중앙정부의 의료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귀금이 장덕의 제자였기에 기대가 자못 컸음도 드러난다고 하겠다.

한편 조선정부는 공식적 기구를 통해 의녀에게 문자해독을 가능케 하는 교육을 실시한 뒤 맥경과 침구술, 약 조제법, 산부인과 분야를 비롯해 각종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고과(考課상벌제도도 마련해 학습을 정기적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통해 의녀의 의학적 자질을 향상시켜 나아갔다. 이밖에도 의녀가 직접 명의, 혹은 비방(秘方) 제조자의 휘하로 들어가 이들의 의술을 개인적으로 직접 전수·교습 받는 방안도 마련·실시됐다. 그 일례로서 황을(黃乙)과 분이(粉伊)의 관계를 들 수 있다.

황을은 성종 23(1492) 무렵 고독(蠱毒)을 잘 만들었던 제조자였다. 고독은 라는 독을 일컫는 것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3가지 벌레(), 곧 하마(蝦蟆)란 이름을 가지고 독도 품은 개구리류, 오공(蜈蚣)이라 일컫는 지네류, 사사()라고 불리는 뱀류의 생물을 잡아 그릇에 담아둬(‘라는 글자는 3가지 벌레<>와 그릇 명<>을 합해 만든 것) 서로 잡아먹게 해 마지막 남는 하나를 ’()라고 한다. 이는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킨다.’라고 한다. 그래서 고는 맹독성이 가장 강한 독약을 제조하는데 쓴다고도 했다. 한편 고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 하듯이 중독환자에게 해독제로 투약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의녀가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고독 제조자로 명성이 높은 황을의 휘하로 들어가 그 제조법을 전수·교습 받게 됐고, 그 의녀의 이름이 분이였던 것이다.

분이는 황을에게 고독 제조법을 배웠으나 그 실력이 황을에 못 미쳤다. 그래서 정부는 진상을 파악코자 황을을 3차례나 불러들여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게 됐다. 이때 황을은 분이에게 고독 제조법의 진수(眞髓)는 숨기고 전수치 않았음을 토로했다. 이는 황을이 비방을 독점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심산에서 비롯됐던 것이기도 하다.

장덕의 의술도 중앙정부가 직접 전수받아 계승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귀금이 혜민서의 의녀로서 중앙정부의 의료계에서 활동하자 정부는 귀금의 휘하로 두 명의 의녀를 보낸 다음 귀금이 장덕으로부터 전수받은 의술을 교습 받게 했던 것이다. 이 사업이 최대한 4년여 추진됐을 무렵 귀금은 황을처럼 고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그녀는 정부에서 보낸 의녀 2명에게 의술 전수를 성실치 않게 한다는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 귀금은 왕의 명령에 따라 의술 전수교육의 조사관에게도 불려갔다. 그녀는 조사관으로부터 의술의 진수를 숨겨 2명의 의녀에게 전수치 않았고 이는 의술을 독점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독차지 하려는 심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더욱이 실토하지 않으면 고문하겠다는 협박도 받기에 이르렀다. 귀금은 제가 일곱 살 때부터 이 의술을 배우기 시작해 열여섯 살이 돼서야 완성했습니다. 지금 제가 마음을 다해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들(2명의 의녀)이 익히지 못했을 뿐입니다.”라고 응대했다. 귀금이 장덕으로부터 의술을 완전히 전수·교습 받는데도 무려 9년이 걸렸다는 얘기가 조사관에게 먹혀들어갔는지 고문당할 위기에서 벗어난 뒤 그 이전의 활동도 계속 이어 나아갔을 듯 싶다.

특히 가씨의 경우는 제주의 여의사로 활동하면서 사족(士族)의 집을 드나들면서 의료 활동을 벌였음이 확인된다. 또한 장덕은 제주에서 여종의 신분으로 의술을 배우고 의료를 베풀 때부터 귀금 등의 여종을 거느려 생활을 꾸려 나아갔다. 더욱이 황을과 귀금이 의술 전수를 꺼리는 이유가 모두 경제적 이득을 독차지하려는 심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로써 가씨, 장덕, 귀금은 명의로서 이름이 알려진 뒤에는 수많은 민간 수요의 의료를 행하면서 상당한 부도 축적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명의의 의술과 비방 제조는 경제적 이득과도 직결됨으로 명의와 비방 제조자가 각각 자신이 지닌 의술의 진수를 쉽게 전수치 않았던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하겠다.

한편 장덕과 함께 제주 여의사의 의술은 중앙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계승해 나아가고자 했음이 확인된다. 이는 제주 여의사의 의술이 뛰어남과 아울러 독특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덕과 귀금 관계, 황을과 분이 관계 등의 기록 부분 (‘성종실록’ 권266, 성종 23년 6월 14일조).
장덕과 귀금 관계, 황을과 분이 관계 등의 기록 부분 (‘성종실록’ 권266, 성종 23년 6월 14일조).

   • ‘동의보감’ 수록 청피 관련 내용의 검토(6-2)

청귤과 황귤의 분류 논란의 단서

‘동의보감’의 청귤피조 부분.
‘동의보감’의 청귤피조 부분.

허준은 제주에 와 보지는 않았던 것 같으나, 어의였기에 제주청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중국 한의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거두절미함으로써 제주청귤의 껍질과 중국 청피와의 차별성이 실종되고 말았다. ‘동의보감청귤피(靑橘皮)’ 조목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11세기 쑤송(蘇頌)본초도경(本草圖經)’에서 지금에야 의사들이 처방함에 있어 비로소 황귤과 청귤로 나눠 사용하는데, 두 약재는 유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어찌 청귤이 유자의 부류가 되겠는가? (중략) 10월에 채취한다고 이르는 것은 모두가 지금의 황귤이다. 현재의 청귤은 황귤과 비슷하나 크기가 작다. 예전 얘기를 보더라도 크기(큼과 작음)와 맛 (씀과 매움)이 같은 부류가 아니니, 곧 다른 한 가지 품종이다(今醫方, 乃用黃橘靑橘, 兩物不言柚, 豈靑橘是柚之類乎又云十月採都是今黃橘也, 而今之靑橘似黃橘而小, 與舊說大小苦辛不類, 則別是一種耳).”에서 허준은 與舊說大小苦辛不類, 을 삭제한 채 今之靑橘似黃橘而小, 別是一種耳라고 일부만 인용했다. 이로써 논란을 초래케 했다고 본다.

한편 16세기 리찬()의학입문(醫學入門)’청피는 (중략)귤피와 같은 종류인데 (중략) 작으면서 색이 푸르고 미성숙한 것을 청피라 한다(靑皮與橘皮一種小而色靑, 未成熟者, 曰靑皮).”라고 했다. 이 가운데 허준은 여귤피일종(與橘皮一種)’미성숙자(未成熟者)’을 거두절미한 채, “모양이 작고 색이 푸르므로 일명 청피라 한다(形小而色靑, 故一名靑皮).”라고만 언급했다. 이로써 청귤은 익어도 작고 푸른색을 띠고 황귤은 설었을 때 작고 푸른색을 띤다는 것의 차별성이 실종되고 말았다. 그래서 논란을 더욱 부채질한 듯싶다.

반면 허균(許筠)은 제주청귤이 달게 익어도 푸른색을 띤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홍길동전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그가 동의보감과 때를 같이 해 발간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청귤은 제주에서 나는데 껍질이 푸르고 맛은 달다(靑橘, 產濟州, 皮靑而味甘).”고 했던 것이다.

결국 허준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쑤송과 리찬의 말을 거두절미해 인용함으로써 혼동을 불러일으켰다고 하겠다. 동의보감의 청귤피 조목은 그 내용을 그대로 보자면 미성숙과 성숙, 제주청귤과 황귤을 분류하지 않은 채 기술됨으로서 이들 양자의 차별성이 실종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동의보감의 기술적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최근까지도 청귤과 황귤의 분류에 관해 논란을 일으키는 불씨, 곧 단서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가 동의보감청귤피조목을 들어낸 다음 그 기술적 문제를 살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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