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日나가사키에서 제주4·3을 보다
[창간특집]日나가사키에서 제주4·3을 보다
  • 홍수영 기자
  • 승인 2018.09.30 1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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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나가사키 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
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 피해 아픔 담고
역사기록·연구 지속하며 아픔 승화 노력
제주4·3 완전 해결 위한 지향점 보여줘
그래픽=이현충 기자 lhc@jejuilbo.net
그래픽=이현충 기자 lhc@jejuilbo.net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사건이 올해 70주년을 맞아 완전 해결을 향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4·3잘못된 국가주의에 의해 무고한 양민이 학살된 고통의 역사라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아픔을 겪은 일본 나가사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릇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교훈을 던지는 국립 나가사키 평화기념관에서 제주 4·3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는 특별 기획을 마련했다.<편집자주>

한 남성이 두 눈을 감은 채 오른팔은 하늘을 향해 들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왼팔은 옆으로 쭉 뻗었다.

일본 나가사키 평화공원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평화기념상의 모습이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9.7m 높이의 거대한 크기로 시선을 끄는 푸른빛 청동상은 나가사키시의 아픔을 담고 있다.

1945년 원자폭탄이 투하된 하늘을 가리킨 오른팔은 그에 대한 무서움을 뜻한다. 옆으로 나란히 뻗은 왼손은 평화를 상징하며 꼭 감은 눈은 전쟁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마음이다. 그 밑에는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희생자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평화기념상 주변에는 견학을 온 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노란색 귀여운 모자를 쓴 초등학생들부터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까지. 어린 학생들에겐 역사인 나가사키 피폭은 누군가에겐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고통이다.

아픔과 희생을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구축으로 승화하기 위해 원폭 투하 중심지에는 추모비가 세워졌고 이를 중심으로 평화공원이 조성됐다.

그 옆에 1996년 나가사키 피폭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국립 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둘러봤다.

패권에 의한 민간인 학살

194589일 오전 112.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들어서면 그날 이후 멈춘 벽시계가 걸려있다. 폭심지에서 약 800m 떨어진 민가에서 발견된 시계의 바늘이 폭발 시각을 알려주고 있다.

전시관에서는 원폭의 열선, 폭풍, 방사선 등에 의한 피해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여학생의 도시락은 숯덩이로 타버렸고 손뼈는 유리와, 두개골은 철모에 녹아 붙어버렸다.

피폭 직후 나가사키시를 담은 사진들에는 통째로 타버린 시체들이 나뒹구는 모습이 가득했다.

그 중 한 사진 앞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여인이 망연자실 서 있는데 그 앞에는 까맣게 탄 시체 한 구가 있었다. 그 여인이 어머니께 선물로 사드린 머리핀을 꽂은 채. 여인은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와 지옥으로 변해버린 마을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집을 나서며 어머니를 그렇게 보게 되리라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194512월 말 추정으로 당시 나가사키 인구 약 24만명 중 73800여 명이 사망하고 74900여 명이 부상당했다. 피폭 직후 사상자만 해도 한 도시의 62% 이상이다.

미국은 원폭 투하 이유로 세계 2차 대전의 조기 종식을 내세웠다. 그런데 왜 꼭 나가사키시여야 했을까. 결정적으로 날씨 때문이었다. 당초 1순위 투하 대상지는 고쿠라로 내정됐지만 구름에 가려 시야가 확보되지 못해 목표도시가 바뀌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점령지에서 자행한 폭력과 인권 유린을 생각하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패권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70여 년간 끝나지 않은 고통

조선인을 포함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자들은 사건 이후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미국에게 원자폭탄 피해에 대한 배상과 책임을 묻는 권리를 완전히 포기했다. 미국은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논리로 원폭 투하를 정당화했고 피해 실상을 은폐하고 축소하느라 바빴다. 2009년이 되어서야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미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원폭 투하의 도의적 책임을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피폭자들은 살아남았을지라도 차라리 그 때 죽는 게 운이 좋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방사능은 수많은 합병증을 유발했고 자녀 세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오랜 시간 피폭자에 대한 방치와 차별이 강하게 존재했고 자녀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건강문제, 후유증 등 피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고통은 피폭 2세대까지 이어졌다. 가난, 결혼 및 취직에서의 차별, 사회적 소외와 심리적 고통 등이 뒤따랐다. 피폭자 스스로 피해 사실을 숨겨야 했던 시간이었다. 피폭 2세들은 지금도 피폭 영향을 의심하면서도 이를 숨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에 한국인 피폭자들은 일본에서부터 그 존재가 부정당하며 의료비, 간병비 지원 등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나가사키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3000여 명의 명단이 폐기된 사실이 2015년 밝혀지기도 했다. 2002년 곽귀훈씨의 일본 재판 승소로 건강수당 지급 등이 이뤄졌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국립 나가사키 원폭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에는 피폭자들의 체험기 등의 자료가 소개되고 있다. 당시 나가사키에 남편과 살고 있다가 피폭자가 된 한국인 할머니의 증언 영상도 볼 수 있었다. 부산 사투리를 쓰는 할머니는 내 배가 터지니까 남편이 소금을 막 바르고 날 업고 병원에 갔어라며 참혹했던 그 날을 기억했다.

아픔을 넘어 평화를 말하다

추도 평화기념관에는 추모공간이 마련됐다. 푸른빛의 유리기둥이 나열된 끝에는 정면으로 명부보관선반이 있다. 원폭사망자들의 성명을 등재한 명부가 안치된 곳이다. 그런데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빈 명부도 함께 안치됐다. 원폭 투하 당시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곳을 나와 교류라운지로 가면 유리벽 너머 굉장히 넓은 검은 벽 위로 물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알갱이로 부서지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면 시원하다는 생각도 드는 데 그 이유를 들으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몸 속까지 화상을 입은 피폭자들이 물을 달라며 호소하다 죽었기 때문에 아픈 영혼들에게 물을 바치고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됐다고 한다. 평화공원 내 평화의 샘도 같은 이유로 만들어졌다.

평화기념관 안내 리플렛에는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을 맹세한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여전히 피폭 2세 등에 대한 충분한 보상 등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한국인 피폭자 등 국외 피해자에 대한 규명과 보상도 적극적이지 않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시만큼은 역사에 대한 기록과 연구를 지속하며 아픔을 평화로 승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다른 듯 비슷한 나가사키시의 모습에서 제주의 4·3이 떠올랐다. 70주년을 맞아 ‘4·3의 완전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졌지만 진정한 지향점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홍수영 기자  gwin1@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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