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여성 치과 전문의 ‘가씨’ 의술 탁월
조선 최초 여성 치과 전문의 ‘가씨’ 의술 탁월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9.0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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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주의 첫 의사와 여의사(4)
‘동의보감’ 외형편 권2, 아치(牙齒) 출아충살충법조
‘동의보감’ 외형편 권2, 아치(牙齒) 출아충살충법조

제주 여의사는 조선의 세종대(1418~1450)에 집중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편이다. 이들 색자니, 효덕, 가씨, 장덕이란 이름과 아울러 이들의 의료활동도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씨가 가장 주목되는 존재라 하겠다.

가씨는 세종대 여느 제주 여의사들과는 달리,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세종대 이륙의 저술, ‘청파극담에서만 확인될 뿐이다. 그럼에도 가씨는 치아의 벌레(齒虫)를 제거하는 의술에 탁월했거니와, 그 의술을 제주 출신의 장덕에게 전수했다. 또한 장덕도 가씨로부터 전수받은 의술을 자신의 여종에게 사사(師事)해 주었고, 그 여종은 장덕의 의술 전수에 힘입어 면천(免賤)함과 동시에 국가 공인의 여의사로 발탁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제주 여의사의 의술은 계속적으로 전수돼 나아갔을 듯 싶다. 그 방식은 도제식(徒弟式)이었다. 의술의 전수·교습기간은 사람마다 개별적 차이가 컸을 것이나 9년 정도 걸렸던 모양이다. 이는 귀금이 장덕으로부터 치충 제거술을 전수받아 완전히 익혔던 기간을 통해 엿 볼 수 있다. 귀금이 제가 일곱 살 때부터 이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지 16세에 이르러서야 완성하였다고 실토했던 기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종대 이후 제주 여의사는 의술이 뛰어나다고 중앙정부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는 치아의 벌레 제거술에 유난히 실력이 좋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음도 드러난다. 결국 가씨는 제주 여의사의 계보를 생성케 함과 아울러 그 정점에 섰던 존재였다고 하겠다.

그럼 제주 여의사의 명성을 높여준 치아의 벌레 제거, 곧 치충의 병증과 의술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이전에 앞서, 우선 가씨의 신분에 대해 검토하도록 하겠다.

조선시대 여의(女醫), 곧 의녀는 거의 천민으로 충당됐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사회지도이념으로 삼았던 터라 양반신분의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했던 편이다. 그래서 제주의 여의사도 노비와 같은 천민층 아니면 성씨(姓氏) 없이 이름만 지닌 양민층이었음이 드러난다. 반면 가씨의 경우는 여느 제주의 여의사와는 달리, 마치 이름은 생략하고, ‘’()라는 성()에 그를 높이는 ’()를 붙였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양반층의 여성으로도 볼 수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때 제주뿐만 아니고, 우리나라 성씨로서 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가씨는 그 자체가 이름이고 그 신분은 성씨가 없는 천민 혹은 양민이라 하겠다.

다음은 치충이란 병증과 그 의술에 대해 살펴보자. 치충은 오늘날의 충치(蟲齒)와 같은 병증으로도 해석하곤 하나 그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충치는 입안에 있는 세균이 당분을 분해하면서 생기는 산에 의해 치아가 녹는 과정에서 생겨나거니와, 그 심화도에 따라 신경의 염증과 심한 통증이 따른다. 이는 동의보감의 관점과 용어로 보자면, 충식통(蟲蝕痛)에 해당할 것이다. 이 경우는 벌레가 치아를 갉아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고 손치더라도, 그 벌레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치충은 벌레가 입안의 잇몸이나 치아 사이에 서식해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병증으로 그 벌레는 육안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의술로서 입안 밖으로 직접 꺼내 육안 확인도 가능한 것이다. 이들 벌레는 자그마한 것으로 외부에서 입안으로 들어갔거나, 혹은 기생충 감염에 따라 생겨났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 동의보감치아에 있는 벌레를 나오게 하고 그 벌레를 죽이는 방법’, 出牙蟲殺蟲法’(출아충살충법)이라 병명을 내세우는 한편 그 의술과 약재를 제시하고 있다. 이로써 치충과 충치는 서로 다른 병증이라 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는 양치질을 소홀하게 한 점이 크게 작용해 생겨났을 것이다.

치충은 조선시대 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만연했던 것 같다. 조선의 국왕 중종(中宗)나의 잇병은 벌레가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 약으로 고치려고 한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의원(內醫院)에서 오늘날의 치약과 같은 효능을 지닌 여신산(如神散)이란 약재를 바쳤다. 치충은 양반층도 종종 걸렸다. 이륙의 청파극담에 의하면 제주의 가씨가 양반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치충의 의술을 효과적으로 펼쳤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때 가씨는 상당한 부도 축적했을 듯싶다.

치충의 치료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하나는 약재와 함께 연기와 열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는 동의보감수록의 출아충살충법에 자세하게 나온다. 그 구체적 양상은 이귀(李貴)가 조선중기 때 쓴 묵재일기(默齋日記)’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에는 호리병박 잎과 귀리를 식초에 적신 뒤 그 잎으로 싸서 약불에 넣어 구운 다음 꺼내 치아를 덮어 따뜻하게 하니 다만 벌레 한 마리가 숨어 있는 것을 잡았다. 벌레가 숨은 형태는 구더기와 같았다.”라고 나오는 것이다. 치충은 침술에 의해서도 고쳤다. ‘청파극담에 따르면, 제주의 가씨는 치충을 제거하는데 신기(神技)에 가까운 의술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 의술은 침을 통해 이뤄지기도 했다.

제주의 가씨는 조선 전기 때 치충 치료의 최고 권위자였고 치충을 비롯한 각종 치과 의술을 장덕에게 전수·교습토록 했다. 이후 장덕은 치과 의술로 중앙으로도 발탁돼 그 명성을 빛냈다. 이렇게 된 데는 가씨가 큰 몫을 했다고 하겠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자면 가씨는 조선 최초의 여성 치과 전문의라할 수 있는 것이다.

 • 미숙과 청피 이용의 역사적 추이 고찰(4)

중국서 청귤피 송나라 때 이르러 사용

미숙과의 청피(靑皮)’, 곧 풋귤의 껍질 약재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용됐을까? 기록을 통해 들여다보면, 3세기 후반 지한()감과 귤은 같은 부류이다(柑乃橘之屬).”라 했거니와, 973년 마즈(馬志)개보본초(開寶本草)’에서 유감껍질은 약에 쓰고, 산감껍질은 인후동통을 치료한다. 이밖에 나머지 어떤 감도 쓰지 않는다. 한편 사감과 청감도 있는데 고유한 특성이 서로 비슷하다(乳柑皮入藥, 山柑皮療咽痛, 餘皆不堪用, 又有沙柑靑柑, 體性相類).”고 썼다. 청피가 송나라 건국초기만 하더라도 약재로서 거론되지 않았던 것이다. 리스쩐(李時珍)청귤피는 예전에 사용하는 자가 없었으나 송나라 때 이르러 의사들이 처음 사용했다(靑橘皮, 古無用者, 至宋時醫家始用之).”고 했다. 사실 14년의 긴 작업 끝에 992년에 발간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에 비로소 청피가 실려 있다. 곧 중국은 청피가 송나라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반면 우리나라는 1052년 제주에서 귤을 고려왕조에 세금으로 바칠 만큼 경작이 성행했으나 청피는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중국을 보면, 1178년 한옌즈(韓彦直)귤록채적(採摘)’(귤따기)이란 항목에 음력 99일에 다다라도 색깔이 아직 노랗지 않은 걸 따내는 일을 일러 푸른 귤따기라 한다.(중략) 청감은 진실로 사람들이 얻기를 좋아하는 바다. 그래서 익기를 기다리지 않고 따는 것이 상인들 사이에서는 뛰어난 능력이라 하거니와, 혹 그렇게 한다(採摘. 歲當重陽, 色未黃, 有採之者, 名曰摘靑靑柑固人所樂得, 然採之不待其熟, 巧於商者間, 或然爾).” 했고, 또한 입약(立藥)’(약의 배합·조제) 항목에서는 청귤은 곧 청피가 된다. (귤피·청피) 다 약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것이다(立藥...靑橘則爲靑皮, 皆藥之所須者).” 라고도 썼다. 즉 중양절 때 푸른색 미숙과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청피를 만들어 중요한 약재로도 사용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1186년 장위안쑤(張元素)진주낭(珍珠囊)’에서 인경보사설(引經報使說)을 제창했거니와 진피는 위를 치료하고 청피는 아래를 치료한다(陳皮治高, 靑皮治低).”고도 했다. 즉 청피는 신체 하부의 병을 치료할 때 다른 약물들을 끌고 가서 약효를 더욱 높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의 제자 리가오(李杲)에 의해 학설로서 체계화되기도 했다.

한편 우리나라는 청귤이 1234년 이규보의 시에서 처음 보인다. 그럼에도, 1236년 간행의 고려시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귤 관련 약재로서 지실(枳實)만이 거론될 뿐, 진피·청피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우리나라의 경우는 여태 고려부터 전해지는 의학서에서 진피·청피사용의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단지 1323년 침몰 추정의 신안해저유물선에서 나온 배송증을 통해 고려·중국·일본 간 진피교역이 행해졌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다음은 조선시대 저술의 책을 통해 청피에 대해 살펴보겠다.

1078년 송의 국립약국 처방 취합, 간행의 ‘화제국방(和劑局方)’ 수록 청귤피 부분.
1078년 송의 국립약국 처방 취합, 간행의 ‘화제국방(和劑局方)’ 수록 청귤피 부분.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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