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에 가을바다를 담아서
편지에 가을바다를 담아서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8.09.0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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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文理)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드는 덕인지 열심히 공부하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포기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부지런히 책을 읽는데 힘쓰거라. 보통집안 사람보다 100배 더 열심히 노력해야만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

-“꾸준한 지적 노력과 신께서 만든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모든 삶의 고통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주는 천사들입니다. 이 천사들은 저를 다독거려주고 강하게 해주지만 동시에 무자비할 정도로 엄합니다.”

앞의 것은 귀양살이 중이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고, 뒤의 것은 스위스 공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다. 둘 다 얼마나 절절한지 지금도 읽는 사람을 숙연해지게 만든다.

 

편지엔 이렇게 힘이 있다. 정성 들여 쓴 편지는 굳게 닫힌 사람의 마음을 열고, 지쳐 쓰려지려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단 몇 줄의 내용이라도 손으로 직접 쓴 연하장 한 장은 1년 내내 소식 없어 서운하던 심정을 한 순간에 녹인다. 솔직하게 잘못을 비는 편지는 끊어진 사랑을 다시 이어주고, 따뜻한 축하의 메시지는 라이벌을 친구로 바꾸고, 작은 일에 대한 감사의 편지는 든든한 인맥을 이끌어낸다.

아무리 그래도 번거롭고 귀찮아서일까. 편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우편함에 쌓이는 건 광고물, 간행물, 청첩장, 세금고지서, 의례적인 안내장 정도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새벽 두세 시에도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는 세상에서 편지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일지 모른다.

사실 쓰는 건 물론 우표를 사서 붙이고 우체통을 찾아 넣는 일도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꼭꼭 봉해진 편지봉투를 뜯을 때의 설렘은 이메일을 볼 때와 비교할 수 없다. 정성은 결코 대체되지 않는 까닭이다.

 

지금의 중년층 이상은 초등학교 시절 국군의 날이 다가오면 학교 수업시간에 편지를 썼다.

용감한 국군아저씨께.” 이름도 모르는 군인에게 보내는 이 위문편지는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정도였지만 그래도 썼다 지웠다 공을 들였다.

그 뿐이랴. 여자 애들은 예쁜 가을 낙엽을 몇 잎 붙여 놓는다. 선생님은 편지를 잘 쓴 친구에게 참 잘 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풍경이 사라졌다.

본지 보도에 따르면 제주지방병무청이 국군의 날을 앞두고 오는 1019일까지 군 장병 감사편지 보내기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이 캠페인에는 병무청에서 도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엽서도 나누어 준다고 하는데 참여도가 그리 높지 않은 모양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 하지만 이 보도를 보며 가슴 한 쪽이 비어있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말한다. 말로 장황하게 얘기하는 것보다, 몇 줄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게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그만이라고.

게다가 편지는 생각을 깊이 하면서 고치기를 거듭하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제격이라고 한다.

그럴 것이다. 마음을 담아내는 데는 편지만한 것이 없다.

입시공부에 짓눌려 있는 자녀에게 희망의 글을, 멀리 떨어져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지인에게 그리움의 글을 띄워 보내듯이, 이름 모를 군인에게도 편지를 보내면 이 보다 더한 청량제가 있을까 싶다. 여기에 제주 가을바다를 담아서 말이다.

편지만이 지니는 매력은 따로 있다. 받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그 편지를 읽는 모습을 그려보고,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은 기쁘다 못해 설레기까지 한다.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애틋한 마음이 서려 있기에 난잡하지 않고 정갈한 것도 편지가 갖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 가을에는 행여 글 내용이 연약하다고 아니면 가볍다고 흉볼까봐 편지 쓰는 일을 망설이지 말자.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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