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겨울, 그리고 제주
가는 겨울, 그리고 제주
  • 정흥남 논설실장
  • 승인 2016.02.1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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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의 이 시는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하는 ‘진눈깨비’가 되지 말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함박눈’이 되자, 즉 세상이 차가울수록 따뜻한 편에 서자는 의미로 특히 겨울이면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의 하나다. 함박눈 보기가 흔치 않았던 올 제주의 겨울. 대신 장마철에나 나타날법한 굵은 빗방울이 쉼 없이 제주섬을 할퀸 지긋지긋했던 제주의 겨울이 한편으로 비켜서고 있다. 봄이 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겨울을 고난의 계절 또는 시련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엔 더더욱 겨울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입춘(立春)이 지나면 양지바른 언덕 주변을 돌아 다니면서 봄나물 채취에 여념이 없었다. 겨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동물들은 추위를 피해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으로 몸을 숨겨야 하고, 크고 작은 식물들조차 자신들의 몸을 최대한 낮춰 봄기운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만물은 언제나 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제주에 말 그대로 장마 아닌 장마가 이어졌던 올 겨울. 제주도민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물론 그 시련은 현재 진행형이다. 감귤산업은 치명상을 입었다. 수확시기에 맞춰 비 날씨가 설치는 바람에 수확시기를 놓친 농민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 와중에 시중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감귤가격이 폭락, 농민들의 마음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들었다. 감귤산업침체는 제주 골목경기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급기야 지방정부인 제주도가 상품용 감귤에 대해 ‘시장격리’라는 고육책까지 집행하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됐다. 물론 감귤가격이 이처럼 떨어진 데에는 기상악화 뿐만 아니라 경기침체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지만 궂은 날씨가 주요인이 됐다. 감귤가격이 폭락하면서 적지 않은 감귤원에는 아직도 감귤이 가지에 매달린 채 썩고 있다. 농민들이 수확을 포기한 때문이다. 비 날씨에 신물이 날 무렵인 지난달 하순 돌연 32년만의 폭설을 동반한 기록적인 한파가 엄습했다. 제주가 꽁꽁 얼어붙었고 공항이 폐쇄됐다. 당연히 10만명 가까운 관광객들의 발이 묶이고 제주공항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 기록적인 한파는 제주사회 전반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제주가 육지와 연결이 단절돼 완전히 고립됐다. 한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허둥거린 지방정부인 제주도와 국제자유도시 제주의 관문인 제주국제공항을 관리·운영하고 있는 한국공항공사의 치부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성격을 표현할 때 흔히 나오는 말이 ‘냄비근성’이다. 냄비가 빨리 끓고 빨리 식듯 어떤 일이 있으면 크게 흥분하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잊어버리는 것을 빗댄 말이다. 명심할 것을 오랜 시간 기억에 담아 그로인해 발생하는 부작용과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하는데 금방 잊어버리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올 겨울 발생한 감귤가격 폭락과 한파에 대응하는 미숙한 행태는 미래로 나가야 하는 제주가 넘어야 할 과제를 명확하게 제시했다. 감귤가격 폭락은 감귤산업 전반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제주감귤이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나갈 수 있을지 근본적인 의문을 남겼다. 이에는 감귤정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기록적 한파는 통상적으로 예측하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대비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던졌다. 제주가 언제든지 육지와 단절돼 바다 한가운데 고립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올 겨울이 던진 이 두 과제는 사실 제주가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과제다. 시기가 앞당겨 졌을 뿐이다. 이제 현명한 답을 찾는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똑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른다면 ‘제주의 봄날’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정흥남 논설실장  jh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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