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아버님
  • 부남철 기자
  • 승인 2018.08.0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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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뜨거운 여름이다. 날씨도 뜨거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더욱 뜨겁다.

지난주 뜨거운 여름을 뒤로 하고 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었던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오셨던 아버님이다.

31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리면 1987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씨는 1월 13일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강제 연행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다음날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허위 조사 결과를 발표해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려 했다.

6ㆍ10 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 사건은 올 초 개봉한 영화 ‘1987’을 계기로 재조명되면서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아들이 물고문으로 사망한 뒤 아버지 박정기씨는 넋 나간 모습으로 이렇게 내뱉었다. 31년 전, 자식을 가슴에 묻은 채 평생 한 맺힌 삶을 살던 아버님이 지난달 28일 영면했다. 박종철씨는 지금 열사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 아버님에게는 그냥 아들로 남았을 것이다. 그 아들을 생각하면 힘겹게 살아오신 아버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공무원 생활을 하던 박정기씨는 1987년 1월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막내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을 시작했다. 이 재판은 민사소송에서 사망한 피해자 대신 유가족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신원권’이 인정된 첫 번째 재판이다.

이후 아버님은 아들을 대신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늘 시위대 앞에 서 있었다.

1998년 11월부터는 여의도에서 민주열사들의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 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농성에도 들어갔다. 이후 단식 농성으로 이어진 422일 간의 농성 끝에 국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경찰이 시위하던 학생들을 쫓으면 박정기씨는 “내 자식 죽인 놈들 천벌을 받으리라”라면서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님은 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기나 물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이지만 풍족할 땐 그 가치를 잊고 산다. 민주주의도 다르지 않다. 온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겠다는 염원 하나로 최루탄 가스가 진동하는 거리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게 불과 30여 년 전이다. 박종철 열사를 비롯한 수 많은 열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독재정권의 무릎을 꿇리는 데 큰 힘이 됐기에 우리는 ‘촛불혁명’을 통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시대를 찾았다.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오셨던 아버님이 계셨다.

아들을 먼저 보냈지만 그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되새겼으면 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지도 모르지만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부모의 마음과 그 아들의 죽음이 대한민국에 던진 의미를 생각한다면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 더운 나날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던 많은 이들이 떠나간다. 하지만 그들의 지핀 용광로는 식지 않을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의 모든 아버지들께 자식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부남철 기자  bunc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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