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칠순의 독백
어느 칠순의 독백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7.3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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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식 시인·제주어 육성보존위원

세월은 쏜 화살 같이 내달려서 어느덧 나도 칠십이 넘었다. 환갑이 지났으니 생년에 따른 사주팔자도 마무리한 셈이라서 토정비결도 졸업했다. 그래서 환갑이후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흐뭇한 마음으로 아프지 말 것’, ‘빚을 지지 말 것’, ‘남에게 원한 사지 말 것이라는 좌우명을 설정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에 중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통증이 나타나면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전전긍긍하면서도 그동안 써온 시를 정리하느라고 바빴다. 한편으로는 비상금이 약간 있어 신용이 넘치는 아내에게 맡겼다. 그 돈은 어느 농촌, 다시 말하자면 미래를 내다보고 부동산 값이 저렴한 육지에 땅을 사려고 모아둔 돈이다.

이제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도로 달라고 했더니, 살려주니까 보따리 내 놓으라는 격이라고 입을 막고는 그 돈 어디 안가니까 염려 말라고 안심시키려고 다독인다. 진정으로 도왔다면 당연히 돌려주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아내에게 손해 끼칠 인물이 아니므로.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그 일인데 포기하라는 거나 다름없다. 아니다. 앞길을 막는 거다. 어쩌면 조용히 살다가 가라는 거다. 에어컨 켜놓고 원 없이 TV 시청으로 시간을 죽이고 제때에 차려준 식단으로 편안히 여생을 맞이하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투병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300평을 사려고 했던 계획을 100평으로 줄이고 고군분투하고 있음이다. 이러노라니 아내가 원망스럽다. 좌우명 중에 가장 혁혁한 남에게 원한 사지 말 것이라는 대목이 더욱 찬란하다.

세월이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죽을 때는 세상일을 정돈하고 편안하게 눈 감고 죽어야 하겠기에 별의별 회오가 떠오른다. 그동안은 남에게 못 되게 군 것, 불효한 것, 첫사랑을 울린 것 등등으로 미흡한 구석을 뉘우침으로 땜질하고 꿰매면서 여태까지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 텅에(닭 둥지)에 고사리 손을 집어넣고 따스한 달걀을 꺼내노라면 암탉은 동그란 눈을 뜨고 쓸쓸한 소리를 내었다. 병아리가 될 계란을 계란말이로 먹었으니 미안할 따름이다.

그런데 가장 고마운 아내가 섭섭해서 눈을 못 감는 경우가 생기면 이런 불행이 또 있겠는가! 내가 떠나면 남긴 유품만 정리해도 지금 준 돈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거지꼴을 만들고 있으니 이 여름 무더운 열기 속에서 땀을 흘리는 내 신세가 기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생명의 은인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니 아내의 유방암은 남편의 책임이고, 남편의 전립선암은 아내의 책임이라는 엉뚱한 생각도 난다. 제 정신이 아닌 거다. 아내의 인품도 다양하다. 멸망으로 이끄는 악처가 있는가 하면 위기가 닥쳐야만 구해주는 조건부 천사가 있고, 당신의 뜻이라면 지옥이라도 가보자고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는 현모양처도 있다.

사랑은 미완성이 완성이라는 명언이 있듯이 부부란 애정의 우물이고, 배려의 궁궐이다. 내 남편은 내가 이만큼이라도 보살펴서 칠순이 넘게 살고 있으니 고마운 줄 알라고 하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도록 애쓰련다. 눈은 감아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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