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선정과 分斷시대의 잣대
독립유공자 선정과 分斷시대의 잣대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6.1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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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정부가 ‘제4차 국가보훈발전기본계획(2018~2022년)’을 마련하고,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을 개선했다고 한다. 여성과 학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광복 후 사회주의 활동자에 대해서는 북한 정권수립에 기여하지 않은 경우 포상을 전향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개선으로 그동안 행적 불분명 등의 이유로 서훈이 이뤄지지 않던 제주지역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와 해녀항일운동에 참여 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부는 1949년부터 올해까지 1만4879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각종 훈장을 서훈했다. 하지만 정부가 서훈한 독립유공자들도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을 전하지 못한 경우가 전체 독립유공자 1만4879명의 40%에 가까운 5616명에 달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보훈학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는 수백만 명에 이르고 이 중 순국자만 15만명이 넘는다.

그럼에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1만4000여 명에 그친다.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숨은 독립유공자 발굴도 중요하다.

특히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도 적극 발굴해 서훈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1919년 3월 21일 조천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시범(1890~1948년), 김장환(1902~?)이다.

조천만세운동은 그 해 3월 16일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 도민들을 규합해 김시범이 3월 21일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인 것이다.

이날 만세시위로 김시범은 징역 1년, 김장환은 징역 8월의 옥고를 치뤘다.

문제는 김시범이 광복 이후 초대 조천면장으로 재임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관덕정 3·1사건에 관여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였다는 데 있다.

김장환은 출옥 이후 서울로 상경해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평양 태생의 부인과 재혼한 후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독립운동을 어떤 수단으로 할 것이냐는 그 당시의 상황에 따른 것이다.

일제 시절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한편에서는 사회주의를 통해 독립을 찾으려고 했고, 이승만 등은 미국을 택했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방식은 개인과 시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공적이 해방 이후 벌어진 정치 상황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제는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에 분단(分斷)시대의 잣대를 치울 때가 됐다. 다만 이런 작업이 또 다른 이념갈등을 불러오지 않도록 균형된 인식은 필요하다.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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