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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이 준 선물강은숙.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숙명여대·가천대 외래교수
제주일보 | 승인 2018.06.05

[제주일보] 먼 곳의 글씨가 흐릿해진 것은 꽤 돼 ‘이제 드디어 노안이 찾아오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근래 사물 윤곽이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지더니 더불어 몸 어디선가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집을 나선 후 한참 만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단어가 금새 생각나질 않아 “그거, 그거 있잖아”라는 이야기를 몇 차례씩 하게 된다. 그런 내 자신이 어딘가 불편하고 싫어서 짜증도 늘었다.

나이가 들어 이제 몸이 본격적으로 조금씩 신호를 보내는데 그 변화를 불편해 하며 몸더러 ‘짜증나게 늙고 있냐’고 화를 내고 있었다. 안경점을 찾았더니 전반적인 생활을 할 때와 집중해서 글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을 할 때 등 도합 2개의 안경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가방 안 화장품 손가방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는데, 안경 지갑은 2개가 들어가 있다. 안경만 맞췄다고 다 되는 일도 아니었다. 먼거리를 볼 때, 근거리를 볼 때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위치를 다르게 해야 하는 연습이 또 필요했다.

연습을 하다가 또 버럭 짜증이 나 안경을 벗어 던지고 서성이기도 했다. 안경을 벗으면 흐릿하고 쓰면 어지럽고 이래도 저래도 불편한 상황에 짜증만 내는 내 자신이 더 싫어졌다.

그런 시간을 보내던 중 무심히 책을 펼치니 이런 글이 있었다.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중략)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 시였다.

읽는 순간 아!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는 거였지!’라는 안도감과 깨달음의 탄성이었다.

시를 읽고 난 후 청춘에 집착하고 있던 자신을 비로소 조금 내려 놓고 중년의 끝을 향해서 열려 있는 문의 고리를 잡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느꼈다.

인생의 봄과 여름인 소년기과 청년기는 열정을 가지고 실험도 하고 모색도 해보는 시기다. 그런데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데도 혼자서만 아직 봄과 여름을 고집한다면 아마 그 고집의 열기로 폭발할 수도 있다. 이제 수확을 하고 수렴을 해야 하는 시기이니 말이다.

다행히도 이 시기가 되면 비록 몸은 늙고 노쇠해질 수 있지만 그 자리에 많은 것이 필요 없어지게 된다. 즉 예쁘게만 보이고 싶은 욕구가 벗어지면서 쇼핑도 예전처럼 당기지 않고 맛있는 것에 대한 욕심도 줄어들게 된다. 이때도 청춘을 고집하다 보면 평생 청춘에 끌려다니는 추한 모습이 될 수도 있다.

중년기를 지나 노인기로 접어들 때 가장 큰 보물은 ‘실패의 경험’이다. 트라우마라고 커다란 쇠창살 안에 어두운 짐승 마냥 실패를 가둬선 안 된다. 분노와 어리석음, 탐욕을 가졌던 어리고 젊었던 시절의 시간들 속에서 실패라는 경험치를 통해 ‘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는 결국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덜어주는 인생의 추가 된다. 직접 겪은 실수와 고생은 가장 큰 자랑스러움이 된다. 청춘의 시간이 준 선물이다. 성숙한 삶으로 이끄는 선물.

마음을 활짝 열고 삶의 시절에 맞게 도달한 가을과 겨울을 맞이해야 한다.

젊은 날의 충동과 질풍노도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통찰의 시기로 진입해야 한다. 어찌 생각하면 비로소 온전히 세상과 만나는 참 어른이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럴려면 가까운 관계일수록 우정과 배움이 필요하다. 서로가 스승이 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관계. 중년과 노년으로 갈수록 가장 치명적인 어려움은 ‘외로움’이다.

안경을 썼다 벗으며, 먼 곳을 바라보다 가까운 곳을 들여다 보는 연습을 하며 이제 어른으로 늙어갈 용기, 청춘의 아류가 아닌 뚜벅한 존재로 살아갈 지혜를 향해 한 걸음 내딛어야겠다는 마음을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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