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도의 상징 '영주관' 복원을
천년 고도의 상징 '영주관' 복원을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5.08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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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80호 ‘제주목관아 영주관 객사터’가 시민공원의 형태로 도민들에게 개방된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제주도는 이를 두고 ‘도내 최초로 시민공원 형태로 개방된 유적지’라고 홍보를 해왔다.

하지만 이 시민공원의 실체적 사실은 ‘도내 최초로 미발굴 유적지를 도민들에게 개방해 훼손시키는 첫 사례’일 뿐이다.

본지 보도에 따르면 당국이 이 곳을 역사문화 휴식공간으로 개방을 했어도 시민들이 외면하고 있다고 한다. 그늘이 될 나무 하나 없이 횡댕그렁한 대지에 잔디만 심어있을 뿐, 앉아 쉴 벤치나 의자도 하나 없는 곳에 어느 시민들이 휴식을 하러가겠는가. 한 마디로 엉터리 유적지 보전 행정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 사정을 알아보면 더욱 그렇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이 객사터에 영주관을 복원하는 일이 쉽지 않으니 시민들의 공원으로라도 쓰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가 기존 콘크리트 담장을 자연석으로 바꾸고, 천연잔디를 심고, 수목 식재와 벤치 등 편의시설을 하려했는데 문화재청이 제동을 걸었을 것이다.

문화재청의 제동은 당연하다. 미발굴 유적지에 시설을 하는 것은 매장 유구(遺構)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화재 훼손 행위이기 때문이다. 제주목관아지는 관덕정(觀德亭, 보물 제322호) 인접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탐라국으로부터 조선·근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의 유구와 문화층이 확인된 바 있다. 여러 층의 유적이 겹친 곳이어서 영주관 객사터 역시 신중하고도 정밀한 발굴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그동안 발굴조사 결과 제주목 관아지에서는 시대상으로는 조선 전기 말 16세기경부터 후기 19세기경까지의 건물터와 담장터 등이 확인됐다. 또한 이들 조선시대 유구 밑에서는 통일신라시대(탐라국)의 문화층도 나타났다. 조선 초 고득종이 쓴 ‘홍화각기(弘化閣記)’에 따르면 당시 제주목의 관아 시설은 총 58개 건물에 206칸 규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중요한 유적지였다.

그러나 이런 유적지를 이런 식으로 관리하다 보면 유적 유구가 다 사라질 것이다. 하루속히 객사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고, 또 영주관과 그 부속 객사의 복원 사업이 절실하다.

영주관이 객사라고해서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다. 전남 나주시 나주목에 복원된 객사 금성관의 모습을 보면 그 규모와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영주관은 제주도에 오는 중앙정부의 안무사, 어사들이 임시 치소(治所)로서 천년 고도(古都)의 상징이며 역사의 현장이다.

북초등학교 객사터 일부 부지 문제를 대체 대지로 풀어내고 복원사업을 빨리 시작해야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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