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에 부쳐
오월에 부쳐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5.0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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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희 수필가

[제주일보] 오월이다. 올해는 이 계절을 맞는 느낌이 별나게 산뜻하다. 뭐랄까. 홀가분함 같은 거다. 미뤄놨던 빨랫감을 콸콸 흐르는 용천수에서 빨랫방망이로 탕탕 두드려 묵은 때를 씻어 바싹 말린 후, 햇빛 냄새를 맡는 기분이랄까. 아니면 늘 쓰라렸던 오목가슴 체증기가 사라져 버려서 시원한 기분인 거 같기도 하다. 가정의 달에 걸맞게 훈훈한 계절이라서인가. 이미 마음은 모란 작약이 만개하여 풍요롭고 찔레와 아카시 꽃향기 풍겨와 달뜨게 한다.

지난 4월은 제주를 들뜨게 했다. 어느 시인은 시<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어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라고 읊었다. 70년 전, 가장 잔인한 달에 무참히 당한 제주인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제주는 그 4월을 움트게 하고 살려서 꽃 피워 열매 맺혀야 한다는 걸 잊은 적이 없다. 4월이 오면 연연불망하며 그 모진 기억 깨우기와 서글픈 욕망에 흐느꼈다. 올해, 드디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 눈물겨운 진실의 싹을 움틔웠다. 막혔던 숨골이 터졌다. 동백꽃이 울면서 웃었다. 제주인들도 동백꽃 단 가슴 쓸어내리며 울며 웃고 있다.

역사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과거에서 끝나지 않으니 현재에 이어져 미래로 나아간다.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 진실한 길로 흐르게 해야 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끓임 없는 대화‘이기에

삼 년 전이다. 제주에 범람한 소나무 재선충은 우리 밭에도 어김없이 침범했다. 인부들이 병든 소나무를 자르기 위해 주위에 잡목을 정리하며 내가 아끼던 동백나무도 휩쓸어 묻어 버렸다. 서운해서 밭에 갈 때마다 그 자리로 눈길 주곤 했는데 작년에 고사된 나무 무더기 사이를 뚫고 고개 내민 동백나무 가지를 발견했다. 꽃봉오리까지 몇 알 대롱 매달았다. 나무는 부러져 있었지만 용케도 한 가닥 이어진 명줄이 있어 엎디어 있는 나무를 뿌리가 되살리고 있었다.

살아있음에 반가워 용하다고 쓰다듬었다. 암흑 속에서 버텨 줬지만 엎딘 채로 자라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러진 줄기 부위를 자르며 새 가지들이 돋아 오르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또 한 번 아픔을 주었지만 줄기 곧게 뻗어 거목으로 자라기를 희망하며.

오월, 동백나무 그루터기에 새 생명이 깃들었다. 솟는 줄기가 힘차다. 바싹 마른 그루터기에 싹이 트는 건, 경이다. 고난을 겪은 후 솟구치는 생명이라 귀하고 어여쁘다.

뿌리가 참았던 눈물을 마구 흘린다. 새싹에 기쁨의 눈물 흥건하여 반들거린다.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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