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사랑해
그래도, 사랑해
  • 제주일보
  • 승인 201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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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숙.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숙명여대·가천대 외래교수

[제주일보] 진군이는 필자와 만나던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진군이는 친구들과 함께 열쇠가 꽂혀 있는 오토바이를 주인 허락 없이 타고 가다가 미끄러지며 도로에 주차돼 있던 차와 부딪쳤다. 다행히 함께 타고 있던 친구는 가벼운 찰과상 에 그쳤고 차도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성년자인데다가 면허 없이 오토바이를 몰았고 더군다나 주인 허락 없이 함부로 탔기 때문에 소년보호재판이 열렸고 처분 중 가족상담도 있었다.

진군이는 친할머니와 함께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할머니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옮기고, 간식코너에서 커피도 타서 드리는 진군이의 모습은 그저 평범했다. 잠시 후 작은아버지가 들어왔다. 진군이가 상담 시간에 늦을까봐 할머니와 먼저 내리게 한 뒤 작은아버지는 주차하고 조금 후 입실한 것이다.

진군이는 할머니와 작은아버지, 이렇게 세 명이 가족을 이뤄 살고 있었다. 생후 100일을 막 넘길 즈음 부모가 이혼했고 아버지가 양육을 맡았지만 사업을 하느라 여러 도시를 다녀 막상 진군이를 직접 돌보지는 못했다. 할머니와 작은아버지가 작은 가게를 꾸리며 진군이 뒷바라지를 했다.

진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엄마는 어디 있어요”라고 한 번 묻고는 다신 엄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고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도 괜히 진군이 마음만 아프게 할까봐 아예 ‘엄마’라는 단어는 꺼내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작은아버지가 진군이와 게임도 하고 공부도 챙겨주며 형제처럼,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다.

진군이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방에서 늦게까지 있다가 귀가했는데 어느덧 학교도 가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들이 집으로, 게임방으로 진군이를 찾아가 규칙을 제시하고 벌칙도 줘봤지만 진군이는 점점 게임에만 몰두하다가 겨우 수업일수를 채우고 졸업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큰 사고를 치진 않았지만 학교보다는 게임방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하루 종일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과 늘 무리지어 있다가 이번 일도 겪게 된 거라고 했다.

진군이처럼 성장 과정에서 ‘위기’를 진하게 맞이하는 아이들이 있다. 위기가 온다고 누구나 다 위기 청소년이 되진 않는다. 어떤 아이들은 건강하게 극복한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못된 방식을 선택해 스스로가 더 큰 좌절을 경험하고 부적응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문제 행동을 더욱 강하게 표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물게 된다.

위기를 강하게 경험하는 청소년들은 모두 다 자기 중심적이다. 매사를 남탓으로 돌린다. 자기 비하 혹은 자기 과시 성향이 강한 아이라고 오로지 아이 몫으로만 돌리는 것은 위험하다. 아이들에게 위해한 환경과 지지할 수 있는 자원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 문제를 아이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상담 장면으로 끌어들여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도록 한 것이다.

결국 아이가 가장 크게 기댈 곳은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들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긍정적 자원을 발견하고 연결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실 누구보다 그 아이가 가장 변하고 싶어한다.

조금 늦더라도 기다려 주며 항상 아이 곁에 사랑하는 가족이,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시간과 모습들을 아이는 바라고 있다.

게임에 몰두하는 뇌를 잠시 쉬게 하며 진군이와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진군이의 할머니와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상담에 참여하도록 했다.

가족 전체가 모여 진군이가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보드게임인 ‘블루마블’을 했다. 어색해서 계면쩍게 웃고 팔에 소름이 돋는다며 우스개 소리도 해가며 차츰 진군이는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바싹 근접해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 큰 것 같지만 아직은 어리고, 어린 것 같지만 어느새 다 커버린 청소년의 아이들. 그래도 그 아이들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래도, 사랑해”이리라.

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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