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가 넘치는 사회
‘명예’가 넘치는 사회
  • 제주일보
  • 승인 2018.04.1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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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따라 죽는 것이 미덕이다.

화장(火葬)이 시작되고 불타고 있는 시신을 둘러싼 조문객들은 망자의 아내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순간을 기다린다.

여인은 그런 기대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두렵다. 망설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왜 따라 죽어야 하는지 납득하지도 못하고, 설사 그래야 할 까닭을 이해했다 해도 사람은 스스로 목숨 던지기가 절대 쉽지 않은 법이다.

그 순간 조문객 누군가 실수를 가장해 울먹이며 머뭇거리고 있는 여인을 불길 속으로 밀친다. 놀랄 새도 없이 여인은 ‘가문의 명예(名譽)’를 지킨 열녀가 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죽어가는 여인에게 열녀는 의미가 없다. 사티(sati)라는 이 고약한 풍습을 두고 ‘명예’라는 이름을 말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셰익스피어는 “명예는 장례식의 상장(喪章)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명예욕이란 사람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사람들이 매사에 ‘명예’를 찾는것이 그런 때문이다.

요즘 헌법에 명시하자는 ‘명예혁명’ 주창자들도 그렇다.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란 본래 1688년 영국에서 일어난 무혈시민혁명을 일컫는 서양사 전문용어이다. 이 혁명은 왕권과 의회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게하고 의회정치의 기초를 다져 놓았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법정에 섰을 때, 김영삼 대통령도 ‘역사 바로세우기’는 국민의 자존을 회복하고 나라의 밝은 앞날을 여는 ‘명예혁명’이라고 선언했었다.

당시 김 대통령이 지칭한 ‘명예혁명’이 단순히 무혈혁명을 뜻하는 것인지, 그보다 더 심오한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시대는 돌고돌아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수감되고 또다시 ‘명예혁명’이다.

이제 시대의 주제는 국정농단 세력과 정경유착 세력을 척결하는 ‘나라 바로세우기’다.

촛불이 단순히 박근혜-문재인이라는 대통령의 교체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질서’와 ‘희망의 원칙’을 근본에서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 ‘명예혁명론’이다.

▲명예란 본래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이름을 뜻하거나 자랑스런 평판을 일컫는 명사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이 말이 지위나 직명을 나타내는 말 위에 얹혀 쓰이면서 본뜻과는 다른 의미로 둔갑해 버렸다.

‘명예교수’ ‘명예박사’는 “이미 퇴물이 된 전직교수” “학문상의 특별한 공헌이 없는 사람”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명예제대’란 아예 “장애인이 돼 하는 제대”쯤으로 생각하고, ‘명예퇴직’은 이미 그것이 불명예라는 훈장을 안겨주는 의미로 전달된다.

‘명예퇴직’에 명예가 없고 ‘희망퇴직’에 희망을 찾기 힘들다는 얘기가 마음에 와닿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쏟아지는 명예란 말에 왜 세월의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일까.

“명예란 대개의 경우 실제보다 지나친 속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 실감 난다.

▲서울 가락동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감귤을 취급하는 청과법인 대표 등 5명을 제주도 ‘명예도민’으로 선정하고 명예도민증이 전달됐다.

명예도민은 제주도가 공공의 복리증진과 문화발전에 업적이 있는 사람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수여하는 칭호다.

명예제주도민에게는 골프장 그린피, 항공, 선박 운임료, 일부 관광지 입장료 할인 및 제주 홍보물 등을 받아 볼 수 있는 혜택이 부여된다. 올해부터는 명예제주도민 배우자에게도 명예도민배우자증을 제공해 동일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월 현재 이런 명예제주도민증을 받은 국내외 인사는 모두 1716명이다.

처음엔 희소가치가 있어 제법 인기가 있었는데 요즘은 ‘골프장 그린피 할인권’정도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명예, 명예, 명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간 곳 없어졌다고 하는데, 왜 이 시대에 또 ‘명예’가 넘치는가.

옛말에 명예가 ‘멍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매사가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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