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 건너 김석범-현기영 ‘4 · 3문학동지’ 확인
현해탄 건너 김석범-현기영 ‘4 · 3문학동지’ 확인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8.04.07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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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서 대담…객석, 함께 웃고 울고 1시간30분
두 작가의 화두 ‘대학살과 항쟁’ ‘해방공간 3년’…“통일되면 민주주의 시작은 ‘제주4‧3’”
4 · 3문학의 두 거장, 김석범 작가(무대 왼쪽 두 번째)와 현기영 작가가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제주4·3 70주년에 맞춰 대담을 가졌다. <사진=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

[제주일보=변경혜 기자] 4‧3문학을 대표하는 김석범 작가와 현기영 작가가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제주4·3 70주년에 맞춰 대담을 가졌다.

“나무가 성장해서 그 생애 최고 정점에서 어떻게 되죠? 선생님은 지금 정점에 있고, 지금도 집필하고 계시죠. 선생님 나이가 되려면 저도 앞으로 16년 남았는데, 인간으로서 선생님을 모방하려고 합니다. 인간도 아흔이 넘으면 신처럼 되죠. 그때까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그래서 저에게 신이예요. 앞에 귀가 붙으면 귀신이고요”

1941년생 현기영 선생의 한마디에 6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1층 로비가 한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4·3문학의 두 거장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은 1925년생 김석범 선생 앞에서 70대 개구쟁이가 된 현 작가의 말에 ‘빵’ 터졌다가도 “일본에서 일본말로 4·3을 소설로 쓴다는 건, 대단히 외로운 일이예요. 그런데 순이삼촌!, 아! 여기 내 동지가 있구나, 외롭지 않다. 그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기영씨는 그런 존재입니다”라는 90대 노 작가의 말에 객석은 고요해졌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일본에서, 한국에서 4·3문학과 함께 ‘동지’로 살아온 두 노 작가의 길고 긴 여정은 1시간30분으로는 너무나 짧았다.

김석범 작가가 대담에서 발언하고있다

“현 선생을 알게 된 게 80년대 초경이었어요. 1978년에 ‘순이삼촌’을 발표했죠. 일본에서 일본말로 4·3을 소설로 쓴다는 건, 대단히 외로운 일입니다. 물론 재일조선인도 있고 우리동포도 있지만, 일본인들에겐 4·3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상관이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그때는 일본문학계에서 저를 접수하지(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저는 정치와 맞섰지만 일본문학은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피해서 순수문학을 추구하고, 한국도 일본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러잖습니까. 그래서 조총련에서도 나와서(탈퇴) 북에서는 ‘반혁명분자’가 됐고 남에서는 1988년 즈음부터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기피인물’이 됐죠. 그때 한국의 '순이삼촌'을 알게 됐습니다. 이름은 현기영, 그때 충격은 보통이 아니었어요. ‘아, 여기 내 동지가 있구나, 외롭지 않다’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기영씨는 그런 존재입니다. 문학적 동지, 이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는 거예요”

김 선생은 어제 일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감동, 4·3의 동지가 있다. 그것도 일본말로 4·3을 쓰는 게 아니라, 그것도 고향말, 우리말로 쓰는 4·3. 그때 일본문학에서 저도 일정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현 선생의 작품을 알려야겠다’ 생각하고 출판사에 일일이 연락하고 현 작가에 대해 알렸지요. 그래서 출판이 됐습니다. ‘이번 (70주년 제주4·3추념식에) 동경에서 오신 손님들 가운데 그 책을 세 번 읽었다는 분이 그 책을 가지고 왔었어요. 저는 평생을 제주현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때 우리말로 4·3을 써서 잡혀들어가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 듣고….”

김 선생은 눈물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현기영 작가가 대담에서 발언하고있다

지난 3일 70주년 4‧3추념식을 했던 현 선생은 오랜 시간 4‧3의 이름짓기를 고민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4‧3, 4‧3사건, 사건이라고 하면 가장 중립적 명칭이죠. 저는 추념식 때에도 ‘항쟁’이라고 했는데, 4‧3은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가장 처참한 범죄이기에, 항쟁보다 대학살에 관심이 큽니다. 동전의 안과 밖, 앞면이 항쟁이라면 뒷면은 대학살. 하나만을 강조할 수는 없어요. 항쟁과 수난은 다 같이 가야 해요.

저는 이 대학살이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에, 그 당시 4‧3의 비극을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거라면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지만, 4‧3은 너무나 기막힌 사건이기에 인간의 언어로 재현할 수가 없죠. (제주사람들은)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난다’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눈물을 흘렸어요. 살아남은 이들은 그 수십년의 공포, 제가 삼십년이 지나서 ‘순이삼촌’을 썼는데, 이제야 저도 4‧3을 조금만 들어도 눈물이 나요. 문학으로 4‧3을 쓰지만 ‘인간의 언어로 진실에 가깝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해왔어요”

 

그러면서 현 선생은 1948년 4월 봉기와 그 배경을 각각 조망해야 한다고 말했다.

“48년 4월3일 봉기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전에 일어난 1년간의 봉기는 항쟁아닙니까. 미국도, 소련도 다 삼팔선 그어놓고 나누려고 했지요. 제주도는 북도 남도 아닌 단일정부, 통일정부를 원했어요. 그때 친일파 빨리 단죄하고 청산하자고 했지요. 반민특위도 있었고. 그래서 제주에서는 47년 3.1절대회, 열흘뒤 3.10총파업을 한 거고 그래서 제주젊은이 수천명이 끌려가 고문당한 거예요. 48년 4월3일 한반도를 적색으로 만들려고 봉기한 거냐고 하는데 구닥다리 소총 20여점 가지고 어떻게 미국과 대항해서 이길 수 있겠어요.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는 거였다. 부모가 끌려가 죽으니 자식된 도리로, 오빠된 도리로 싸우는 게 항쟁입니다. 그 다음 목숨을 지키기 위해 토벌대와 무장투쟁을 벌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항쟁을 이야기합니다”

김 선생은 지난해 이호철문학상 수상 당시 ‘4‧3평화공원의 누운 백비에 이름을 새겨넣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질문에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몇해전 4‧3평화상 때도 그 얘기를 해서 문제가 됐는데, 이호철문학상 때 좀 구체적으로 얘기했어요. 여기 현기영 선생도 항쟁이란 표현을 썼지만 백비에 이름을 붙이는 건 역사적으로 이름을 새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 거예요. 4‧3민중항쟁, 추념식 전날 문예회관에서 그 백비를 또 세웠잖아요.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신문기자들이 막 쫒아와서 부끄러워서 도망쳤어요. 김명식 선생하고 뒤에서 껴안고 막 눈물을 흘렸어요. 슬퍼서 통곡한게 아니라 기뻐서 울었어요. 이렇게 현기영 선생하고 4‧3을 얘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고맙고 기쁜지 몰라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김 선생의 말에 객석은 박수로 화답했다.

“제가 제주도 북초등학교에서도 강의를 했는데, 나중에 교원들하고 간단하게 간담회를 했어요. 젊은 교원들이 여러 말을 했는데, 이제 ‘내가 일부러 강의할 필요가 없겠구나’ 했어요. 외람되고 건방지지만, 4‧3에 대해 내가 선배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교원들의 생각이 튼튼합니다”

4‧3의 역사적 재정립을 요구해온 김 선생의 말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시기를 강조했다.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그 타이틀에 다 담겨있어요. 이승만은 제주를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3‧1혁명정신을 이어간다고, 대한민국의 법통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친일파 정부입니다. 제주의 학살로 정통성을 꾸며냈습니다. 아흔이 넘어 이런 건방지고 외람되게 역사를 얘기하지만, 이제 젊은 역사학자들이 그 3년을 검토해보라는 겁니다”

 

지난 시절 국방부에서 4‧3을 다룬 ‘지상의 숟가락 하나’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것과 관련 작가의 ‘불온성’에 대한 질문에 현 선생은 또한번 유머로 답했다.

“불온성이라, 저는 너무 온건하게 생겼잖아요. 온건한 사람을 불온하게 보는 것이 불온하거죠.

과거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군인도 곧 시민사회로 돌아올텐데, 군부와 시민을 구분하는 게 맞느냐, 노무현 정부가 이승만 정부를 대신해 국가폭력에 사과했듯이, 그 막심한 과오를 후배군대가 대신해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면 안되나? 군부와 경찰 제주도민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현 선생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회담이 제주에서 개최되기를 소망하기도 했다.

“제주4‧3항쟁, 항쟁이라는 것을 계급적 이념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민족적 개념이다. 분단을 거부하고 하나의 나라로 ‘통일정부를 세우자’ ‘친일파 청산하자’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고 너무도 중요한 명제 아닙니까? 한국사회의 모든 모순과 부패는 분단에서 오는 거죠. 문재인정부 들어서 냉전이 가고 남북화해가 오고 있지요. 제주의 아픈 경험, 처절한 경험의 토대가 통일의 밑걸음이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남북회담은 제주도에서 해주면 좋겠어요”

 

김 선생은 훗날 제주4‧3이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이어져야 하다고 말했다.

“십년 후가 될지, 이십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남북을 통일해서 우리 역사,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후 역사를 쓰게 되면 아마 첫 장의 민주주의 투쟁의 첫걸음은 제주4‧3이 될겁니다.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것이 투쟁없이, 희생없이 오는 게 아니예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4‧3추모 70주년 80주년 100주년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해방공간의 역사적 평가가 필요합니다. 물론 민중봉기가 좋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데 외부에서 쳐들어오고 3만명이 죽었습니다. 태평양같은 피바다가 제주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때 제주사람들에게 트라우마 4‧3병이라는 게 있었어요. 죽지않은 사람,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도 4‧3병이예요. 오십년이 될지, 백년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통일조국의 민주주의 첫 출발은 제주도다. 내 망상입니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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