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이미 내 가슴에
봄은 이미 내 가슴에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3.2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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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제주일보] 지겹게 눈이 내리는 겨울이다. 눈 덮인 한라산을 보면 봄이 더디 올 것만 같다. 그런데 입춘이 지나며 시나브로 매운바람 사이로 봄이 실려 오는 걸 느낀다. 날씨가 좋다며 후배가 올레길을 제안한다. 완주는 무리라며 난색을 내비치자 조천에서 우리가 사는 집까지 역주행을 제안한다.

조천 만세동산에서 걷는 역주행. 며칠 전 화북에서 조천까지 걸었던 경험이 있어 길라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는데, 바로 허당인 게 들통 난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당황해 올레길을 안내하는 리본도 못 찾아 헤맨다. 멋쩍음에 은근슬쩍 후배 뒤로 빠져 걷는다.

전에 보이지 않던 건물이랑 초가집, 돌담 밑에 활짝 핀 수선화가 새롭다. 추운 겨울을 보낸 수선화가 반갑다며 진한 향기로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저절로 발길이 멈춘다. 수선화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내면서 가슴 아팠던 건 꽃향기를 맡아 볼 수 없다는 거다. 유독 꽃을 사랑하는 친구였으니 향기도 전송받았으리라.

연북정에 올랐다. 제주로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사모의 충정을 보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임금님이 있는 북쪽 하늘을 향해 하루라도 빨리 귀양에서 풀려나기를 소원하며 바라다 봤던 바다는 오늘 눈이 시리다.

평일이기도 하지만 바람이 쌀쌀해서일까? 낚시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며칠 전 학꽁치 낚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길을 걸었다. 낚싯대만 던지면 너도나도 학꽁치 올리는 모습에서 이참에 낚시를 배워볼까 싶기도 하다. 남자만의 취미라 생각했는데 부부가 낚시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 짓게 한다.

같은 코스인데도 역주행으로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다른 풍경이다.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음을 실감한다. 그동안 사람을 평가할 때 첫 인상만으로 선입견을 가져 판단하고, 어떤 한 생각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처럼 역주행으로 걸으면서 관심을 가졌으면 내면의 일부라도 볼 수 있었는데, 겉모습만 봤던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바다를 끼고 걷는 내내 청정 제주 바다의 환경을 헤치고 있는 괭생이모자반을 보니 속이 상하다. 한가로이 노니는 원앙의 모습에 힐링도 잠시, 괭생이모자반 썩는 냄새가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처리방안은 없는 걸까? 후배랑 이야기하며 예전에 부모님이 바다에서 올라 온 듬북이나, 감태를 농사짓는 밭 거름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났다.

“이왕 떠내려 오는 거 제주 경제에 보탬이 되는 거 와시민 조을건디.” 이야기하며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화북이다. 세 시간여의 짧은 올레길이였지만 길에서 맞이하는 햇살과 바람에 봄기운이 물씬 스며있음을 느낀다.

집에 도착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길을 걸으며 맡았던 수선화 향이 짙게 여운으로 남는다. 완주는 못했지만 마실 삼아 나섰던 올레길, 살아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봄은 이미 지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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