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각각 수많은 사연 쌓여있는 원도심 ‘옛 추억 새록새록’
제각각 수많은 사연 쌓여있는 원도심 ‘옛 추억 새록새록’
  • 제주일보
  • 승인 2018.03.1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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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제17코스(광령~제주원도심올레) - 용연~중앙로종점(2㎞)

[제주일보] # 동한두기의 추억

줄다리를 건너기 전은 용담2동 서한두기였지만, 건너는 순간 용담1동 동한두기다. ‘한두기’는 한내의 하류가 땅이 낮아 큰물이 있을 때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쌓았기 때문에 ‘한둑’이라 했고, 예전에는 ‘대독포[大甕浦]’라 썼다. 눈에 익은 옛 골목은 사라지고 대부분의 길이 넓어졌다. 그리고 병문천은 버렝이깍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멘트로 덮어 놓았다.

과거 이 동네를 비롯한 부러리와 무근성은 서부지역에서 온 자취생들의 많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보리쌀이나 간장이 떨어지면 아는 친구네 가서 얻어먹었다. 구제주권에 학교가 몰려 있을 때라 ‘배고픈 다리’만 건너면 정거장으로 갈 수 있었고, 시내 중심은 관덕정이라 싸고 인기 있는 자취 동네였다. 필자도 한때 선반물 앞에 살면서 그 물을 양동이로 떠다 먹었던 적이 있다.

 

# 복신미륵을 찾아서

복신미륵(福神彌勒) 입구를 알리는 간판을 따라 용화사로 간다. 제주도 지정 민속문화재 제1호인 이 미륵상은 제주성의 서쪽에 있는 것이라 ‘서자복’이라 부른다. 용화사 안에 자리해 있으면서 옛날 제주성안을 수호하는 기능을 했다. 키 273㎝, 몸체 둘레 315㎝, 받침돌 높이 66㎝로 돌하르방과 같은 모양의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인자하게 내려다보는 눈, 우뚝 솟은 코, 지그시 다문 입술, 커다란 귀 등이 매력이다.

옆에는 높이 75㎝, 둘레 100㎝의 남근처럼 생긴 동자상이 서 있는데, 그 위에 걸터앉아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해마다 음력 2월과 11월 보름에 미륵을 위한 불공이 법당에서 행해진다.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마을을 수호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민간신앙과 불교의 결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 무근성을 지나며

무근성은 글자 그대로 ‘묵은 성터’라는 뜻이다. 처음 성을 쌓았을 때는 병문천을 해자로 쌓았으나 너무 넓어, 지금의 무근성7길을 따라 북성로로 이어지는 곳으로 줄여 쌓았기 때문에 먼저 성안에 포함되었다 안 된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탐라국 시대 이후로 부호들이 살았다는데, 성이 허물어지면서 성안으로 진출하고 이후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하 교장네 집 공부만 하던 원형이 형, 그 앞집 풍금 소리 담을 넘던 부산으로 이사 간 양 갈래 댕기머리 그 아이. 쌍둥이네 집 애자 누나 숙자 누나 무근성 펠레 종표 형 그 동생 종보, 한쪽 다리 절면서 유난히 축구를 좋아하던 상욱이 형, 마당 너른 네커리 기와집 윤할망네 집 문간방에 살던 주씨 성을 가진 새침데기 미령이, 우물 깊은 집 민수 형 현수 형 그리고 준수, 우리 골목에서 제일 먼저 텔레비전을 놓은 집 충하 형 충희 형네 집, 몰레물할망네 집 그 손자손녀 성훈이 요망진 진의, 딸만 일곱 순실이 순생이네 집…. (중략) //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김수열 시 ‘장공장 골목’ 부분.

 

# 관덕정과 제주목 관아지

무근성에서 목관아지 담장을 따라 관덕정으로 나온다. 세종 30년(1448) 제주목사 신숙정(辛淑晴)에 의해 제주목 관아의 부속 건물로 지었다는 관덕정(觀德亭)은 지금 보물 제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러 차례의 중창과 보수 끝에 2006년 대대적인 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처마를 자르고 둘레를 막아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전시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관덕정 앞마당은 오랫동안 제주의 중심지이자 광장 역할을 하였다. 입춘굿을 하며 새해를 알리고, 이재수의난 때는 분노한 군중들이 모여 천주교인들에게 보복을 자행했다. 1947년 삼일절 행사가 끝나고 시가행진을 벌이다 4․3의 도화선인 3․1사건이 벌어진 곳이자, 이덕구의 시체를 나무십자가에 묶어 전시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큰 행사나 모임은 이곳에서 치렀다.

지금은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어 건물들이 차례로 복원되었지만, 과거 제주목사가 부임해 근무했던 관아는 일제강점기에 다 훼철되어 경찰서와 민가가 들어서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던 것을 1991년 본격적인 발굴․정비 사업으로 1차 복원을 완료했는데, 대문인 진해루(鎭海樓)로부터 목사의 집무실 홍화각(弘化閣), 집정실 연희각(延曦閣), 연회장 우연당(友蓮堂), 휴식처 귤림당(橘林堂), 그리고 망경루(望京樓) 등이 그것이다.

 

# 향사당을 지나 코스 종점까지

수많은 사연을 다 풀어놓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길로 접어든다. 얼마 안 가 왼쪽이 향사당이다. 향사당은 봄․가을에 고을 사람들이 모여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근래에는 이곳에서 시낭송 행사나 문화행사 같은 것이 열린다.

삼도2동 주민센터 앞에는 구도심권 살리기 사업을 상징하듯 관내 돌아볼 만한 유적지 사진과 설명이 붙어있다. 앞서 지나온 관덕정, 목관아, 향사당을 비롯해 최초의 신성학교 터와 천주교당 터, 찰미헌 터, 성주청 터, 최초의 성내교회와 오일장 터, 탐라시대 고성터, 총물당 터, 칠성단 월대 터, 객사대청 영주관 터, 이익․남강 이승훈 적거 터, 풍운뇌우당 터, 성황당, 여단 터, 좌의랑․우의랑 터, 찬주헌 터, 사창 터, 원제국 총관부 터 등이다.

과거 제주대학교병원이 있던 자리는 이아헌 터라는데, 리모델링해 제주대학교 창업보육센터와 예술공간 ‘이아’가 들어섰다. 제주도기념물 제34호 녹나무는 아직도 푸른데 가지마다 일엽초를 두르고 있다. 극장 옆을 지나 제주중앙성당에서 방향을 바꾼다. 제주교구의 첫 번째 성당인 주교좌 중앙성당은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는데, 건물은 1930년 최덕홍 신부에 의해 지금의 자리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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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읍, 2018-03-15 10:36:46
한두기 구름다리 용수절벽이 우리 어릴적 높이가 9단 7단 하면서
사까다질 (다이빙, 주로 발로 착수) 해던곳입주, 암수라 부르기도
그리고 무근성 통물도 써야 진짜로~~무근성 내력이 ~~
河 교장은 故하순우 교장, 故 강세독 원로교장도 무근성 거주 해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