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리...남은 자리
떠난 자리...남은 자리
  • 정흥남 논설실장
  • 승인 2016.01.28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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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만의 기록적인 폭설을 동반한 ‘최강한파’가 제주섬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난 주말부터 주초까지 이어진 한파는 제주섬에 많은 생채기를 남겼다. 제주를 찾았던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은 예상치 못한 어려운 상황을 맞아야 했다. 말 그대로 새해를 맞아 들뜬 마음으로 제주에 여행왔던 10만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뜻하지 않은 홍역을 치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제주한파는 전국적인 관심사가 됐고, 각 언론은 실시간 제주상황을 전국에 전파했다. 이번 한파는 제주라는 거대한 섬이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될 수 있다는 막연한 우려를 현실로 만들었다. 제주도민들 또한 이번 상황을 겪으면서 이들 관광객들 못지않게 크고 작은 불편을 감내해야 했다. 전기 끊김, 물 끊김, 버스 끊김 등 평상시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던 최악 상황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맞으면서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제주전역의 재난상황을 살피며 매 순간 효율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고 그 효과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해 도민과 관광객들의 어려움을 덜어줘야 하는 제주도 역시 이번 한파를 통해 많은 점을 터득했다. 이번 한파는 이 같은 측면에서 제주사회 전반의 재난 대응력을 한단계 끌어 올렸다.

#“45시간 동안 단 1명도 제주섬을 빠져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했다. 따뜻한 남쪽 섬을 기대하며 제주로 휴가 왔던 관광객 등 9만여명은 하늘길과 바닷길 모두 끊기면서 겨울왕국에 갇혔다” 이번 제주한파를 취재한 한 언론이 당시 상황을 표현한 기사의 일부다. 폭설과 강풍을 동반한 강력한 한파로 제주공항에 발이 묶인 채 하늘만 쳐다보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2박 3일.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악몽 같았다’고 대놓고 털어놨다.

‘재수가 좋아’ 먼저 제주를 빠져나간 관광객들은 타지방 공항에서 ‘금의환향’ 환대를 받았다. 그 순간 이를 바라보던 제주도민들의 가슴은 착잡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이 묶여 제주를 빠져나가지 못할 때 도민들은 자신들의 방을 선뜻 이들에 내줬다. 물론 모두를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SNS를 통해 자신의 집을 무료 제공하겠다는 수많은 도민들의 릴레이 댓글이 훈훈함을 키웠다.

이는 한 사례일 뿐 많은 도민들이 다양한 형태로 온정의 대열에 동참했다. 그런데 그 훈훈한 열기가 오간데 없다. 애초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어려움에 처한 ‘육지 사람들’ 돕기에 나섰던 제주도민들. 그런데도 막상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온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공허한 생각이 시나브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런 일이 언제 있어나 할 정도로 벌써 아득해지고 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는 없다. 지금껏 그랬듯 제주도민들은 이번에도 마음을 담아 ‘손님’들을 대하고 떠나보냈을 뿐이다.

#인간의 망각(忘却)을 논할 땐 흔히 독일 철학자 니체가 등장한다. 그는 “창조와 생산을 위해 망각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인간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창조와 발전을 이뤘다. 독일 고전철학 대표자 중 한사람인 피히테는 “기억(記憶)이 없다면 세계도 없다”고 말했다. 망각과 기억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하는 것이다.

지난 주말 주초 최강한파가 몰아친 제주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제주에서 노숙 아닌 노숙으로 지새웠던 타지방 사람들은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악몽’이었다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흐른 뒤 이번 제주에서의 ‘악몽 같은 순간’을 ‘짜릿했던 여행의 추억’으로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반면 ‘악몽탈출’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기쁘고 들뜬 모습으로 떠나는 그들을 바라봐야 했던 도민들은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제주도민들 또한 시간이 지난 뒤 강추위가 찾아올 땐 지금의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아름다웠던 옛날 이야기’로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떠났다. 그들의 떠난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이 땅이 삶의 터전인 제주도민들이다.

그들에 마음을 열었던 순수함, 그리고 아무런 대가없이 건네주었던 인정. 이 모두를 가슴에 묻어 다시 찾아오는 그들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언제나처럼. 닷새 뒤엔 만물이 소생하는 봄, 그 봄이 옴을 알리는 입춘이다.

정흥남 논설실장  jh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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