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 3월과 老馬之智(노마지지)
새학기 3월과 老馬之智(노마지지)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8.03.0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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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중국 춘추시대 때 일이다. 제나라 환공(桓公)이 재상 관중(管仲)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고죽국 정벌에 나섰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던 중 눈보라 속에 길을 잃고 말았다. 진퇴양난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고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나섰다.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老馬之智可用也).” 즉시 늙은 말을 한 마리 끌고와 고삐를 풀어놓고 앞장 세웠다. 말을 따라가자 얼마 안 돼 큰 길이 나타나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한비자(韓非子) 설림(說林) 편에 나오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고사다.

사실 세상엔 젊음의 패기와 열정만으론 풀어낼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디지털 시대에 노인이 설 자리는 점점 줄고 있지만 노년의 지혜가 빛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거친 세상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과 지혜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뜻이다.

▲장수(長壽)는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축복이다. 노인들이 “아이고, 이젠 그만 살고 싶다” 하는 말은 대표적인 거짓말 중 하나다.

제주 사회도 본격적으로 장수 사회로 진입했다. 하지만 세상은 노인들이 설 곳을 찾기 힘들다. 요즘같은 선거 때에는 후보자들이 동네와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고견(高見)을 묻고 인사를 하지만 평소엔 주변 사람도 자식들도 기꺼이 받들지 않는다.

노인들은 “너는 늙어 보았느냐? 나는 젊어 보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지금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듯 지금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인은 이런 말도 입으로 꺼내서는 안되고 눈으로만 해야 한다. 오죽하면 나이들면 “입은 닫고 지갑만 열어라”는 말이 있을까.

▲몇 살부터 노인이라 할 건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분분하다. 나이 연령보다 중요한 신체 연령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꽃중년’이란 말도 자연스럽다. 빈곤과 질병에서 ‘위대한 탈출’(앵거스 디턴)을 한 사람들은 오래 살고, 젊게 산다.

최근 유엔의 새 연령 분류에 따르면 17세 미만은 미성년, 18~65세는 청년, 66~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부터가 장수 노인이다. 기대 수명은 계속 늘고 있으며 선진국은 곧 120세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표지 기사로 기대 수명이 142세 시대를 다루기도 했다.

그러면 노인은 어떤 사람일까. “스스로 늙었다고 느낀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생각한다. 이 나이에 그런 일을 왜 하느냐고 말하곤 한다. 내일을 기약 못 한다고 느낀다. 젊은이들 활동에 관심 없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게 좋다.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미국 미네소타 의학협회가 정의한 노인의 기준이다. 노인의 기준은 마음가짐의 차원일 뿐 절대 기준은 없다는 얘기다.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2015년 향년 103세로 세상을 떠나신 호서(湖西)대학 설립자인 강석규 선생께서 95세 생일날 쓰셨다는 일기는 큰 가르침이다.

“나는 65세 때 당당한 은퇴(정년퇴직)를 했지만 정년 후 95세를 맞아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후퇴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희망 없는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그때)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제 나는 어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2월달에 홍조근정훈장을 받고 정년퇴직한 멋진 내가 사랑하는 ‘꽃중년’ 선생님.

새학기가 시작된 3월. 오늘 아침 늘 그러듯이 학교를 가려고 나섰다가 “아 참…”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단다.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지 말아요.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생생한 현장의 ‘노마지지’를 후배들에게 가르쳐주고, 글도 쓰고, 또 사랑도 하고….

세상 떠날 적에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미움도 가져갈 것 하나 없는 빈 손이겠지만.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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