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그 뒤
여백의 그 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2.2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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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영. 수필가/제주문인협회장

[제주일보] 장수시대라고 한다. 100세 시대라고 하더니 그것도 뛰어 넘어 백이십을 보는 시대라고 한다. 나는 반갑지가 않다. 지겹다는 생각도 든다.

거의 죽음에 다다른 상태에서 기계나 기구를 사용해서 의사들은 하루라도 연명하게 필사적이다. 그 노력은 성실하지만, 헛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환자는 잠든 채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이런 현대의학의 연명 방법을 생각할 때마다 지금의 의학이 갖는 공허함을 느낀다. 환자의 연명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의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연명의학의 저변에는 육체적인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생각이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서구의학은 인간의 생리적인 육체면만을 대상으로 해서 자라왔다. 우리들 인간에게는 육체만이 아니라 의식도 있다는 걸 의학은 무시해 온 게 아닌가. 의학은 육체의 죽음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관점에서 보니까 인공적으로라도 종말을 연장하려고 해왔다. 그게 쓸쓸하다는 얘기다.

죽음의 공포심은 육체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죽음의 공포가 심하지 않았다고 어느 학자는 말하고 있다. 현대인과 달리 옛날 사람은 육체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내세와 부활을 믿는 사회 공동체 속에서 살았다. 죽음의 공포는 지금의 우리들보다 덜 했다.

캄보디아를 여행했을 때였다. 지글거리는 태양 때문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캄보디아의 가이드에게 물었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운영하는 병원의 봉사자이기도 했다. 깡마른 몸매에 눈망울의 선함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여기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게 뭐에요?” 하고 물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불편하니까 여기에 살죠.”

부족한 것 투성이다. 불편하기만 한 모든 환경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 곳의 사람들은 ‘생’에 대한 집착이 희박하고 포기가 빠르다고 했다. 죽으면 다음 생이 있다고 믿는 종교적 배경인지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백세시대라 하지만 의학은 생리적 육체에밖에 관심이 없다. 노인의 쓸쓸함과 고독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걸 견디며 오래 사는 게 행복인지 나는 모르겠다.

늙어간다는 건 함께 이 인생을 보낸 친구와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잃어가는 것이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본격 시행되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적인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생겼다.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은 존엄사를 희망한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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