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훔쳐 달아나던 용 머문 ‘용두암’…오랜만이라 가슴 ‘설레’
구슬 훔쳐 달아나던 용 머문 ‘용두암’…오랜만이라 가슴 ‘설레’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2.2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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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제17코스(광령~제주원도심올레)-어영소공원~용연(2.8㎞)
어영소공원의 로렐라이 요정상.

[제주일보] # 어영소공원과 수근연대

어영소공원은 해안도로와 바닷가 사이 공간에 쉼터와 조각 등을 배치해 조성한 곳이다. 밤바다 조명시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고, 맞은편에는 카페, 레스토랑, 식당 등이 즐비하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로렐라이 요정상’인데, 독일 로렐라이시에서 우호협력도시인 제주시와의 21세기 공동번영을 기원하며 제주시민들에게 기증한 것이라 했다.

벤치에 새겼던 탐라순력도 그림은 희미하게 바래였지만 바다 쪽으로 세운 방호벽에는 시인들의 시를 적어놓아 그 위 어패류 모형과 잘 어울린다. 이곳 어영 역시 비행장 확장으로 떠나버린 사람들의 살던 자취가 남아있는데, 용천수인 ‘섯물’과 ‘연딧당’ 등이 주인을 잃고 그 빛이 바래가는 느낌이다. 이어 나타나는 수근연대는 동쪽의 사라봉수(직선거리 4.6㎞), 서쪽의 도원봉수(직선거리 2.8㎞)와 서로 교신했던 곳인데, 봉군은 별장 6명, 직군 12명이었다.

 

예비검속 희생자 원혼 위령비.

# 용담레포츠공원과 4.3위령비

다끄내 포구와 마주보는 곳으로 들어가면, 시민들의 건전한 레크레이션과 생활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90년 7월 당시 건설교통부 소유 부지 19,880㎡를 불하받아 1992년에 완공시킨 레저스포츠 공원이 자리해 있다. 주요 시설로 운동장과 야유회장, 족구 및 배구장, 롤러스케이트장 등 여러 가지 시설이 들어서 넓은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깊숙한 곳에는 ‘한국전쟁 시 제주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원혼 위령비’가 서 있다. 제주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회에서 2005년 3월에 세운 이 비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당국의 예비검속에 의해 무참히 희생당한 원혼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1950년 당시 제주경찰서에 구금됐던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한림면 관내 예비검속자 1000여 명 중 500명은 7월 16일과 8월 4일 바다에 수장됐고, 나머지 수백 명이 제주비행장 한쪽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옆에 따로 세워놓은 현곡 선생의 헌시비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1950년 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그날 밤/ 우리들은 한도 많은 이 길을/ 서로 얼싸안고 떠나갔노라// 이승 사는 동안/ 부모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무덤 하나 남겨두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떠났노라// 우리들이 말 못한 말들이사/ 살아있는 그대들인들 어찌 모르랴/ 그대들의 가슴깊이 묻어두었다가/ 아들손자들에게도 전하여다오// 아름다운 우리 고장 제주도가/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는/ 진실로 평화로운 섬이 될 수 있도록/ 서로 손을 잡고 굳게 약속하여 다오’ -현곡 양중해 ‘떠나가는 자의 소원’ 모두

 

# 다끄내 포구에서

수근동은 속칭 ‘다끄내’의 한자 표기이자 용담3동의 자연부락 이름이었다. 지금은 용담레포츠공원이 들어서고, 해안도로 주변에만 음식점이 몇 군데 들어서 있지만, 공항 확장과 소음으로 주민들이 이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포구 주변에 애향의 동산을 조성하고 ‘수근동 유적비’를 세웠다. 비에는 400여 년 전 설촌 후 살아온 사람들의 성씨와 마을의 내력, 토지가 수용되고 소음공해로 떠나가야만 했던 170여 호, 700여명 주민들의 심경을 새기고, ‘매년 5월에 이곳에 모두 모여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고 언젠가 다시 향토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이 유적비를 세운다.’라고 했다.

주변을 돌아보면 어부들과 해녀들이 다니던 ‘뱃당’과 ‘용천수 돌새미’, ‘도댓불’을 확인할 수 있고, ‘용담어촌계’ 입구에는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인증서’를 붙여 놓았다. 안에는 화산석을 붙여놓은 어촌계 건물이 있고, 하얀 건물은 해녀의 집이다.

 

# 말머리

사람이 살았던 동네에는 그 자취가 남고 이야기도 남는다. 다끄내와 한두기의 어름에 바다쪽으로 드러낸 말머리 모양의 바위가 밀려오는 파도에 갈기를 세우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장사 정서방을 내세워 ‘말머리’ 전설을 풀어놓았다.

 

정서방은 다끄내 사람이었다. 한 섬의 쌀밥과 한 마리 분의 돼지고기를 먹어야 겨우 배가 찰 정도여서 사람들은 그를 ‘배 큰 정서방’이라 불렀는데, 힘이 장사였다. 부모는 어떻게든 자식을 먹여 살리려 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관가에 해결을 부탁했다. 관에서는 장사 정서방을 살려두었다가는 나라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해서 죽이기로 결정했다. 관가에 불려간 정서방은 자신을 죽이려는 눈치를 채고 배불리 먹어보고라도 죽겠다는 소원을 말한다. 관에서는 한 섬 쌀밥과 한 마리의 소를 잡아 먹이고, 그의 말대로 큰 바윗돌에 팔다리를 묶어 바다에 던졌다.

정서방은 3일 동안 가라앉지 않고 간헐적으로 물 위로 올라와 ‘어머니! 살까요, 죽을까요?’ 물었는데, 대답이 없자 소리 없이 물속으로 쑥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커다란 백마가 바닷물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백마는 물 위로 머리를 치켜들고는 하늘을 향해 크게 세 번 울더니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서방이 탈 말인데, 주인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이렇듯 말이 머리를 내밀었다가 들어간 곳이라 하여 ‘말머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용두암.

# 용두암과 용연

오랜만에 들르는 용두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서쪽 계단을 통해 내려가 보니 아직도 한두기 해녀 할머니들이 직접 잡은 해산물을 팔고 있다. 그곳을 넘어서면 용두암이 보이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자리를 잡고 보니, 뒤에 호텔건물이 크게 비친다. 할 수 없이 동쪽으로 건물이 안 보이는 곳까지 들어가 수십 컷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라산 산신령의 구슬을 훔쳐 달아나던 용이 산신령이 쏜 화살에 맞아 몸은 바닷물에 잠긴 채 머리는 하늘로 향하게 굳혀 버렸다는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콧등 위에 앉은 세 마리의 새는 무료한지 졸고 있다.

용연 줄다리 입구 하트 모양의 구조물 위에 걸어 놓은 ‘사랑의 자물쇠’를 보면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임을 실감한다. 지금은 꽤 넓고 단단해 보이는 줄다리 위를 걷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문득 영주11경 ‘용연야범(龍淵夜泛)’이 떠오른다.

좀 좁아 보이지만 비교적 낭만적인 분위기가 깃든 이곳에서 풍류객들이 뱃놀이를 했다 하여, 지금은 이를 재현하는 축제가 해마다 열린다. 짙푸른 상록수 아래로 펼쳐진 병풍 같은 석벽에서 그 흔적인 마애명이 여럿 발견된다. 가뭄에 목사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과 그에 대한 전설도 퍼져있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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