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 만세
우리가족 만세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2.13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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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시인 / 다층 편집주간

[제주일보] 올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리면 어린이들과 강아지가 좋아한다는데, 눈이 귀찮아지고 걱정이 되면서 늙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제주시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우리집 마당에는 벌써 한 달째 눈이 녹지 않고 있다.

녹을 만하면 내리고, 녹을 만하면 다시 그 위로 쌓이기를 반복하다보니, 지난 년 초 다녀온 북해도(北海道)의 풍경이 떠오른다.

여행지에서 본 풍경은 아름다우면서도 정취가 있지만, 생활 현장에서의 눈은 불편이라는 단어를 동반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질리도록 하얀 눈. 올 겨울은 흰 색이 지겹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날들이었다.

더구나 비가 내렸지만 쌓인 눈을 녹이기에는 겨울비의 에너지가 모자란 모양이다. 비는 비대로 맞으면서도 아직도 마당의 눈은 발목 치까지 쌓여 있고, 골목은 아직도 빙판이 되어 녹지를 않는다.

설이다. 어느 순간부터 설날이 가까워지면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아직도 남아 있는 눈이 녹지 않아 가족들이 집에 오는 길이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우선 된다. 하지만 집으로 오다가 길이 미끄러우면 걸어오면 될 일이긴 하다.

우리 형제는 3남 7녀, 10남매이다. 그 중에 나는 장남이다. 더구나 장손이다. 위로 다섯의 누나와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 둘 씩 있으니, 나는 딱 중간인 셈이다.

이런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하고, 조카들까지 낳고, 아무도 타지로 나간 사람이 없으니, 직계가족만 모여도 50명이다. 며칠 전 외조카 결혼식에서 사진 촬영을 할 때에는, 신랑측이 아니라, 신랑 외가측만 사진을 따로 찍어야 할 정도였다.

오래전 일이지만, 어느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고 기억이 된다. 가족 단합을 도모할 겸 저녁이나 같이들 먹자고 그리 작지 않은 식당을 통째로 빌린 적이 있는데, 한참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다. 뭔 일인가 싶었는데,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나왔단다. 혹시나 불법 선거운동을 하는 게 아닌가 하기에 한참을 설명하고 신분증을 확인해줘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전통으로 굳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의 장남이자 장손의 사회적 무게는 만만한 게 아니다. 집안 안팎의 일들에 대해 일일이 참여해야 하고, 처가는 물론, 사돈의 팔촌들 대소사까지 내가 얼굴을 안 비치면 섭섭한 티를 낸다. 굳이 실제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이 아니어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의 피곤함은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 식솔이 많으니, 직장생활까지 하는 안사람에게 설 차례 준비는 그야말로 만만하지가 않다. 시장보기도 하루에 끝내지 못하고, 이틀 사흘 걸린다. 이것저것 준비하고 음식을 하고 차례지내고 손님 접대하고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은 가히 초인적인 힘을 요구한다.

나도 나름대로는 도와준다고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성에 차지를 않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살아온 내가 도와준대도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게 설을 ‘치르고’ 나면 나 역시 피곤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안사람 입장에서는 한 게 뭐가 있느냐고 한다. 그러고 보면 몸을 움직여 일한 사람은 자기인데, 나는 빈둥거리기만 한 것으로 보이니, 이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의 가사노동의 강도는 가히 살인적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물론 많이 간소화되고, 분위기가 달라지고는 있다. 할머니나 어머니 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가 불러도 한참 부른 소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시대가 변했음을 어쩌랴.

이제 팔 걷어붙이고 모여 앉아 보자. 고소한 기름내가 진동하는 가족이 모두 하나임을 확인하는 설, 함께 맞아보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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