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학살 마을 참혹한 겨울 지나 세상 밖으로
집단학살 마을 참혹한 겨울 지나 세상 밖으로
  • 현봉철 기자
  • 승인 2018.02.04 1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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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3 진상규명의 시발점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 내 ‘순이삼촌비’. 누워 있는 비석들은 ‘뽑아놓은 무처럼 널브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을 상징한다.

[제주일보=현봉철 기자]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

-현기영 ‘순이삼촌’ 中

매서운 추위였다. 지난달 26일 찾은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에는 한겨울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너븐숭이는 4·3의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1949년 1월 17일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지자 군인들은 주민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한 뒤 처참한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은 학교를 넘어 너븐숭이까지 이어졌다. 결국 이날 300여 명이 집단학살되면서 북촌마을은 4·3사건 최대 피해마을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너븐숭이에서 집단학살이 발생한 음력 12월 19일만 되면 매년 마을 주민 대부분이 통곡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 가운데 100여 명이 집단학살된 ‘당팟’.

참혹한 겨울이었다. 기나긴 겨울이었다. 이 겨울은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나오기까지 이어졌다. 시대의 금기를 깬 이 소설로 4·3은 비로소 조금씩 어둠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4·3사건의 실체를 공개한 이 소설에서 순이 삼촌은 4·3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제주도민 그 자체였다.

북촌마을 사람들은 1993년 4·3 희생자 조사에 나섰고 2000년대 들어 합동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 폭력에 의한 제주4·3 희생에 대해 공식 사과하자 2007년에는 학살현장 가운데 하나인 너븐숭이에 희생자 위령비와 제단, 기념관을 세웠다.

2016년에는 노인회와 부녀회, 4·3유족회 등 마을 주민들의 주도로 당시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4·3의 진실을 공유하는 4·3길이 개통했다.

북촌마을 4·3길은 너븐숭이 4·3기념관을 출발해 마을 서쪽의 서우봉 학살터(몬주기알), 환해장성, 마을의 문화유산인 ‘가릿당’, 4·3의 역사가 많은 북촌포구, 낸시빌레, 꿩동산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1월 17일(음력 12월 19일) 300여명 이상이 희생당했던 ‘북촌대학살’의 현장인 당팟과 북촌초등학교도 포함된다. 길이는 약 7㎞이다.

걸어서 2시간에서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길의 출발은 너븐숭이 4·3기념관이다.

너븐숭이 4·3기념관 전경.

기념관에서 북촌 집단학살의 발생 배경과 과정, 4·3 진상규명 노력 등을 확인할 수 있고, ‘순이삼촌’의 초판본과 외국어 번역판 등을 볼 수 있다.

인근에는 위령비와 4·3사건 당시 희생된 유아들이 매장돼 있는 애기무덤, 순이삼촌비가 있다. 순이삼촌비가 누워 있는 이유는 ‘뽑아놓은 무처럼 널브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을 상징한다.

북촌마을 4·3길은 학살 현장의 이어짐이다. 4·3 당시 북촌과 함덕 주민들이 은신처로 이용했던 서우봉 절벽인 몬주기알 아래의 천연동굴, 마을 청년 14명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된 ‘낸시빌레’,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 가운데 100여 명이 집단학살된 ‘당팟’, 그리고 4·3 집단학살을 상징하는 ‘너븐숭이’까지.

1949년 일어난 북촌대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너븐숭이로 나뉘어 이뤄졌다. 

북촌마을의 아름다운 풍경 사이에는 핏빛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조용한 시골마을이 시대의 광풍에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그리고 그 아픔을 이겨내고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제주시 노형이 고향인 현기영 작가가 북촌마을을 배경으로 순이삼촌을 쓰게 된 배경은 아마도 한날한시 수백명의 마을주민들이 희생당한 것이 4·3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현 작가는 어느해인가 북촌을 찾아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4·3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며 “우리는 이를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해야 하고, 4·3은 평화를 이야기하는 화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순이삼촌의 죽음이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고, 순이삼촌은 당시 4·3의 학살현장에서 이미 죽어 30년 동안 유예됐었다는 소설 ‘순이삼촌’ 속의 구절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4·3의 아픔과 진실 찾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찾아가는 길=제주시 도심에서 동쪽으로 일주도로(1132번)를 따라 조천과 함덕을 지나면 왼족 방면에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3길 3.

현봉철 기자  hbc@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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