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정숙의 향기 아프리카에 퍼지다
故 최정숙의 향기 아프리카에 퍼지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1.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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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수필가·하귀일초등학교장

[제주일보] 제주의 독립 운동가, 여성운동가, 교육자, 의사, 사회활동가였던 故 최정숙 선생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기사를 접했다. 그녀의 숨결이 담긴 학교가 아프리카의 ‘부룬디 공화국’에 건립된다는 내용이었다. 선배 교육자, 신앙인으로 존경하는 분이라 솔깃하고 가슴이 설레었다. 아프리카 중부의 면적 2만 7830㎢, 인구 약 1200만명, 국민총생산 34억 달러인 가난한 나라에 ‘최정숙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된다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고가 설립되면 200명의 여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기술교육과 고등교육을 받게 된다고 한다. 2018년 9월이면 학교에는 깃발이 펄럭이고 희망 가득 찬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칠 것이다.

최정숙여학교 설립이 꿈을 이루기까지는 ‘최정숙을 기리는 모임’이 선두적 역할을 했다. 2014년부터 빈민국에 최정숙여학교 설립을 위해 모금운동을 벌여온 것이다. 3년간 모은 돈이 마중물이 되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최정숙(1902-1997)은 제주 삼도리에서 아버지 최원순, 어머니 박효원의 2남 4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들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고 성품이 곧고 강직하였으며 희생정신이 남달랐다.

그녀의 삶은 주어진 자리에서 사회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열정적인 삶이었다.

최정숙은 여덟 살 때 신성여학교에 들어가서 열두 살 때 베아트리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신성여학교 졸업 후 1915년 서울에 있는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대한의 독립을 외치며 학생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으로 늦은 나이에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제주에 내려와 정화의원을 개원하였다. 그 때에도 가난한 병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가 없는 어려운 노동자들을 위해 주머니를 털었다.

1953년 신성여자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일할 때는 무보수로 봉사하면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녀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제주도 초대교육감으로 재직할 때 더욱 꽃을 피웠다. 여러 학교를 세우는 일 뿐만 아니라 농촌과의 학력격차 해소를 위해 교사 교류를 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폈다.

사회활동에도 열성적이어서 부녀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여성의식 개혁운동을 벌였고 적십자 단체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55년에는 교장으로서의 봉사, 빈민구제 및 병원사업의 공로로 로마교황 훈장을 받았으니 그녀가 얼마나 이타적인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집 한 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1977년 재속프란치스코회의 복장인 갈색 수의복을 입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녀가 졸업한 진명여고에서는 ‘자랑스러운 진명인’으로 故 최정숙을 당당히 자랑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도 故 최정숙은 ‘자랑스러운 제주인’임에 틀림이 없다. 같은 길을 가는 교육자, 신앙인으로서 나의 삶을 돌아보며 그녀의 숨결 한 조각만큼이라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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