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역사 ‘구엄 소금빌레’, 옛모습 되찾아 반가워
400년 역사 ‘구엄 소금빌레’, 옛모습 되찾아 반가워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1.1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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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제16코스(고내~광령올레)-고내포구~구엄포구(4.8㎞)
구엄 소금빌레

[제주일보] # 다락쉼터의 재일 고내인 불망비

고내포구를 벗어나 한 400m쯤 걸었을까? 왼편 바닷가 쪽으로 ‘다락쉼터’가 나타난다.

빌레 위에 잔디가 자연스러운 이곳에는 쉬면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벤치를 여러 개 놓았고, 작은 전망대와 여러 가지 시설물을 배치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재일 고내인 시혜 불망비’다. 일제강점기에 이런 저런 이유로 살길을 찾아 도일한 분들이 고향에 남은 형제나 친척을 부르다 보니 그 수가 많아져, 일본에 고내촌을 이룰 정도라 한다.

학교 다닐 때 이곳 학생들의 사지 교복과 손목시계를 부러워했던 철부지적 기억이 이제 와 부끄럽다. 마을 발전에 도움을 준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말자는 내용이다.

 

‘아, 그 언제였던가. 한일합방 망국의 한, 북받치는 설움 안고 가난을 이기려 고향 땅을 뜨던 날이. 고내봉에 솟아 있는 절개의 송백(松柏). 맑은 시냇물의 물맛을 뒤로 하고 현해탄 건너 일궈온 삶이 아닌가. 물설고 낯 설은 일본 땅에 뿌리내려 살아온 세월은 어느덧 100여 년을 헤아리네. 한시도 고향을 잊은 적 없으니 망향이라, 가슴에 절절했던 그 한을 세상 끝날까지라 한들 어찌 잊으리. (중략) 아아, 그 모든 것이 애향의 정신, 따스한 정으로 활활 타올랐어라. 우리 고내리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불을 지피고, 또 지피고 있으매, 여기 개그미 기정 다락동산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의 파도는 오늘도 푸르게, 더욱 푸르게 부딪히네. 우리 고내리민들은 재일본 고내리 향우들의 크나큰 희생과 높고 깊은 큰 공덕을 가슴에 새기면서, 마음과 정성을 이 비에 담아 우뚝 세우매, 후손만대 그 공덕은 칭송으로 영원하리라’ -‘재일 고내인 시혜 불망비’에서

 

다락쉼터

# 신엄포구와 단애산책로

고내리가 끝나는 지점에 바로 신엄포구가 있다. 배는 그렇게 많지 않고 포구도 그리 깊은 편이 아니다. 갈수록 지대는 조금씩 높아져서 커다란 단애를 이뤘는데, 속칭 ‘남또리’다.

쉼터에는 유배인 조정철과 애달픈 사랑을 나눴던 홍윤애의 이야기를 새겨 넣고, 희한하게도 자유의 종을 만들어 달았다. 새로 만든 도댓불과 해녀상을 지나면 바로 단애산책로로 이어진다.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정군칠 시 ‘달의 난간’ 부분

 

남두연대.

# 고래전망대와 남두연대

단애산책로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소나무와 띠, 그리고 빌레와 잔디가 반복되는 길을 만든다. 중간에 고래전망대가 있으나, 겨울철이라 돌고래를 기대할 수는 없었고, 성난 겨울 파도만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여름 바다에서 헤엄치는 돌고래 떼를 심심치 않게 봤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언제 봤는지 기억이 감감하다.

얼마 안 가 남두연대(南頭煙臺)가 나타난다. 일찍이 제주도기념물 제23-7호 지정된 이 연대는 애월진에 소속돼 있던 시설이다. 동쪽 6.9㎞ 지점의 조부연대와 서쪽 4.2㎞ 지점의 애월연대와 교신했다고 적었다. 지금의 것은 1977년에 보수한 것으로, 윗부분 6.3m×6.4m, 아랫부분 7.9m×7.6m, 높이 3.9m다. 애월진 소속 별장 6인, 봉군 12명이 배치 운영됐다고 하며,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중엄새물

# 중엄새물과 낚시 포인트

중엄새물은 설촌 당시부터 주민들이 주 식수원이었다. 표지석에는 ‘1930년 홍평식(洪平植) 구장이 겨울철 파도 때문에 여인들이 물 길어 나르기가 어려워지자 구민들과 합심하여 지금의 방파제 중간 부분에 있었던 암석을 폭파한 뒤 방파제를 쌓았다’고 새겼다.

풍부한 수량으로 들물 때도 염분이 스미지 않아 물맛이 좋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네 칸으로 갈라진 시멘트 구조물이 있어 칸에 따라 용도를 달리해서 썼음을 알 수 있다.

샘물 동쪽에 바다로 돌출한 바위와 조그만 여(嶼) 둘을 볼 수 있다. 이른바 ‘전분공장 앞 낚시 포인트’다. 전분공장에서 흘러나오는 폐수가 고기를 모으는지는 몰라도 고기가 잘 잡혀서 낚시를 하다가 갑자기 파도가 세어지면, 조난 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곳이다.

 

# 구엄 돌염전

구엄포구 가까이 다다랐을 때, 구엄 돌염전이 나타난다. 전에는 그냥 방치되다시피 했는데, 요즘 들어 새로 복원해 소금을 만드는 과정까지도 세세하게 표지판을 만들어 세웠다.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소금을 만든 것은 명종 14년(1559년)에 강려(姜麗) 목사가 부임해 바닷물로 햇볕을 이용해 소금을 제조하는 방법을 알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이곳 빌레 소금밭은 해안을 따라 길이 300m 가량에 폭은 약 50m로 암반이기 때문에 불규칙하게 형성되었다.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곳 돌염전에서는 물소금, 돌소금, 전오염(삶은 소금)의 형태로 생산됐다. 생산과정을 보면, 거북등처럼 갈라진 틈에 찰흙으로 메워 둑(두렁)을 쌓고 옆에 증발시키는 ‘호겡이’를 만든다. 거기 바닷물을 채우고 증발시켜 염도가 짙어진 ‘곤물’을 얻어 보관했다가 볕 좋은 시기에 증발시키면 소금이 남는데, 여기서 생산된 소금은 품질이 뛰어난 천일염으로 중산간 주민들을 찾아가 농산물과 교환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금밭은 이 마을 일부 주민들의 생업의 터전이 됐고, 390여 년 동안 이어져 왔으나 1950년대 들어 전매를 통해 들어온 소금이 거래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잃게 됐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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