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의 재해석
중간의 재해석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1.1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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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호서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논설위원

[제주일보] ‘범위제한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척도 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점수로 표현할 때 전체 척도 중 특정 범위에만 치우쳐 답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1점부터 7점 척도 사이에서 어떤 대상, 사건,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나타낼 때 낮은 점수 범위에서만 응답하는 엄격화, 정반대로 높은 점수 범위에서만 응답하는 관대화, 그리고 낮지도 높지도 않은 중간 범위에서만 응답하는 중심화를 들 수 있다.

특히 중심화 경향은 연구자나 조사자 사이에서 이슈가 되곤 한다. 명확한 호오(好惡)를 드러내는 찬성이나 반대가 아닌 중간 점수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낳는다. 그래서 중간 점수는 종종 해당 대상, 사건, 사안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잘 알고 관심이 있더라도 명확히 표현하기가 불편해 무리 없이 넘어가고자 하는 소극적인 응답 또는 대세를 관망하는 우유부단한 태도 등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어느 날 황희 정승이 길을 가다가 두 남자가 다투는 광경을 보았다. 황희 정승은 두 남자에게 다가가 이유를 물었다. 한 명이 먼저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황희 정승은 “네 말이 옳구나”(汝言이 是也라)라고 말했다. 이 광경에 다른 한 명은 펄쩍 뛰면서 정말 억울한 사람은 자신이라며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황희 정승은 이번에도 “네 말이 옳구나”라고 말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황희 정승의 하인이 말했다. “대감마님, 두 사람이 싸우는데 어떻게 둘 다 옳을 수 있습니까? 어느 한쪽의 주장은 참이고 어느 한쪽의 주장은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황희 정승은 말했다. “네 말도 옳구나”(汝言이 亦是也라)

이 유명한 고사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무엇이 가장 적절한 해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애민의 마음과 동시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명재상 황희 정승이 해당 사건에 관심이 없다거나 판단하기 어려워서 혹은 명확히 표현하기가 부담스럽거나 우유부단해서 그렇게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한 가능성보다는 따뜻하고 현명했던 명재상의 관점은 각자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과 주장을 접해보니 모두 근거가 있다고 여겨지고, 모두 이해가 되고, 모두 수용할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누군가 범죄에 대한 보다 강력한 처벌에 관해 의견을 물으면 찬성하는 사람의 생각인 ‘질서’나 반대하는 사람의 생각인 ‘인권’ 둘 다 우열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하고, 이해되고, 수용가능하기에 서게 되는 중간자의 입장처럼 말이다. 이러한 ‘중간’ 점수, ‘중간’ 의견은 조금은 달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회의 성숙도를 이야기할 때 흔히 다원성을 이야기한다. 다원적인 사회는 언제나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하고 획일화하지 않는 사회,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떳떳하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모 아니면 도로 정해져있고, 승자와 패자, 성공과 실패가 정해져있는 사회 그래서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은 늘 적이 되고, 상대의 생각과 의견은 그 입장과 근거에 상관없이 내 생각과 의견의 기준으로 배척하는 사회, 이는 분명 성숙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사회만이 아니라 경영의 영역에서도 다원성은 중요하다. 경쟁력 있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는 조직일수록, 그 안에는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공존하며, 이를 포용하는 개방적 문화와 그로 인한 혁신이 싹튼다. 성숙한 사람도 다름 아닌 것 같다. 중간의 의미가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이 갖는 나름의 입장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현명한 입장 내지는 성숙함과 다원성에 대한 갈망으로 보는 것은 좀 과한 것일까?

언니와 동생이 귤 하나를 가지고 내내 다툰다. 언니와 동생은 이렇게 다투느니 그냥 귤을 반씩 나눠가질까 하는 타협을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누가 귤을 가질 것인지의 다툼을 멈추고 왜 귤을 가지려고 하는지 비로소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언니는 배가 고파 귤의 알맹이를 원한다. 하지만 동생은 피부미용에 좋다는 차를 만들려고 귤의 껍대기를 원한다. 결국 둘의 다툼은 언니는 자신의 관점에서 동생이 본인처럼 알맹이를 원한다고 생각하고, 동생은 자신의 관점에서 언니가 본인처럼 껍대기를 원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결국 다툼은 소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언니와 동생은 다행히 소통했지만, 대부분은 소통조차 하지 않는다. 황희 정승은 두 남자와 한 하인을 매개해준 소통의 통로였다. 아마도 이 시대 중간자의 역할이 그런 것일 듯 싶다. 그들의 공간과 역할이 필요하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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