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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이 사랑받는 이유
제주일보 | 승인 2018.01.07

[제주일보] 무술(戊戌)년 초하룻날 아침, 김녕 입산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 샛노란 꽃밥에 이슬이 맺혀 반짝이는 빠알간 동백꽃 꽃송이가 떨어져있다. 진 꽃도 이렇게 청수(淸秀)하는가?

옛 선비들의 말이 꽃의 절정은 낙화(落花)때라고.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닌 듯하다.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 게 생멸(生滅)의 미학이라고 했으니.

동백꽃은 꽃잎이 한잎 두잎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송이 전체가 필 때의 싱그러운 모습 그대로 한꺼번에 떨어진다.

마치 기다렸다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눈사태처럼 비장(悲壯)한 아름다움을 최고점까지 끌어올리고 마지막 순간에 불꽃으로 사그라드는 황홀한 정사(情死)같다.

그래서 옛 선비들이 이 꽃을 좋아했을 것이다. 꽃이 질 때도 지난 날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키면서 조용히 사라지니까.

▲동백꽃만큼 많은 얘깃거리를 가진 꽃도 드물다. 꽃에 대한 전설도 많고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노래와 시, 소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사교장에 나갈 때면 언제나 동백꽃을 안고 간다. 동백꽃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표현.

모든 꽃은 질 무렵이 되면 처음엔 시들기 시작하다가 한잎 두잎 떨어지는 순서를 밟는다. 색깔도 변해 원래의 아름다움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잎이 모두 떨어진 후엔 지난 날의 아름답던 자태와 향기는 자취없이 사라져버리고 흉하기 짝이 없는 몰골만 드러내는 것이 꽃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하지만 동백꽃은 다르다. 비올레타는 다르니까. ‘라 트라비아타’를 쓴 뒤마도 어느 날 동백꽃이 지는 모습을 보고, 비올레타가 비록 창녀일망정 사교장에 갈 때는 항상 동백꽃을 가슴에 안고 가도록 소설을 꾸몄는지 모른다.

▲추사 김정희가 대정 고을에서 유배생활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내가 보낸 여름 옷을 받고 편지를 썼다.

‘당신이 봄날 밤을 새우며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이 이 겨울에야 도착했소. 나는 당신의 마음을 입지도 못하고 머리맡에 둘러 놓았소.(…) 담장에 핀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의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일 것이오.’

동백꽃이 봄 꽃인지 겨울 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꽃 이름에 ‘겨울 동(冬)’자를 붙인 것을 보면 옛 사람들은 겨울 꽃으로 여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통 10월에 꽃망울이 달리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1월에는 본격적으로 핀다. 그리고 짙붉은 꽃잎은 봄의 끝자락까지 물들인다.

올해 동백꽃도 김녕 입산봉뿐 아니라 지금 남원읍 신흥리 동백마을,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등에도 지천으로 피어났을 것이다.

예부터 동백꽃은 사랑을 받았다. 그 이유는 한 겨울에 짙푸른 잎사이에서 단아하고 짙붉은 꽃을 피워 겨우내 움추렸던 사람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때문만이 아니다. 꽃 자체가 여러가지 효능이 있는 생약재로 쓰이고, 씨앗에선 동백 기름이라는 고급유를 얻을 수 있는 이유만도 아니다. 꽃이 지는 마지막 모습이 장렬하고 뒤끝없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꽃은 피어날 때 이미 질 것을 안다.

꽃이 지고 난 그 자리에서 새 생명의 열매를 키워낸다.

동백꽃이 사랑받는 더 큰 이유는 새 생명을 위해 짙붉은 꽃송이 전체가 미련없이 한 덩어리가 돼 몸을 던지기 때문이다. 꽃 자체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사라져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고고함과 당당함을 보여주는 탓이리라. 피어났을 때 그렇게 붉게 최선을 다했기에 죽음 또한 부끄럽지 않게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도 꽃처럼 질 때가 아름다워야 한다는데, 요즘 세태는 동백꽃보다 못한 인간들이 도처에서 득실거리는 것 같다. 지난 날 만개했던 권력의 꽃들도 피어날 때만 알고 질 때를 모른다. 낙조(落照)마저 기운지가 한참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아직도 제 살겠다고 뒤끝이 지저분하니….

꽃이 질 때를 알듯이, 사람의 사라짐에도 미덕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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