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린 아이로 알았는데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늘 어린 아이로 알았는데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1.04 1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서가 추천하는 이달의 책] 딸에 대하여

[제주일보]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 주겠니.”

“난 한참 세상 살았는 줄만 알았는데…이미 미운 털이 박혔고…엄만 내 마음도 모른 채 매일 똑같은 잔소리로 또 자꾸만 보채.”

집에서 모시던 시할머니가 팔을 못 쓰게 되어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짐 정리도 할 겸 TV를 틀어놓고 청소를 하려는데 마침 ‘판타스틱 듀오’라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양희은과 악동뮤지션이 함께 부르는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TV속에서는 패널과 청중들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노래가 뭐라고, 가사 속 주인공이 된 듯 눈물이 흐르는 나였다.

한 달 전 오랜만에 여행을 가면서 들고 갔던 책 한 권. 오늘의 젊은 작가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가 이 노래와 오버랩되며 더 가슴이 먹먹해졌던 것 같다. 이 책에는 4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프린트물을 가방에 넣고 언제 해고될지 모른 채 하루 종일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대학 시간 강사’에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일에 참견하고 간섭하며 일을 벌이는 위태위태한 운동가’에 심지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라고 외치며 동성연인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겠다는 아이다. 엄마는 딸의 육아 때문에 교사를 그만두고 교습소, 도배,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 보험 세일즈, 구내식당, 종국에는 요양보호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엄마가 일하고 있는 요양원에는 ‘젠’이라는 할머니가 있다. 젊었을 때 한국계 입양아와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평생을 일하다 지금은 치매로 요양원에 머무르고 있는 그녀는 젊은 날을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이들에게 바치다 가족도 없이 치매 노인이 돼 기저귀와 소독용 거즈를 아끼며 노인들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상대하는 요양원으로 쫓겨(?)난다. 젠을 보며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라고 엄마는 독백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자 레인. 레인은 딸의 동성 연인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상처받은 엄마에 대한 배려와 돌봄은 그녀의 몫이었다. 엄마는 딸이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이처럼 예기치 못한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과정을 엄마의 심정으로 독백하고 있다. 딸에게, 그래도 딸이기에, 그들을 이해하는 기적 같은 날이 오리라, 이 모든 것을 견뎌내는 날이 오리라 믿으며….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엄마와 딸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혐오와 차별 속에서 여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생전에 어떤 훌륭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살다 보면 다 똑같아진다고, 결국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되는 무연고자 이야기 등을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내 얘길 들어보라고 나도 마음이 많이 아파 힘들어하고 있다고. 엄마 나를 좀 믿어줘요. 따스한 손을 내밀어줘요. 엄마의 걱정보다 난 더 잘 해낼 수 있어요.”

양희은의 노래 가사처럼 결국 엄마는 딸을 이해하고 믿어줄 것이다.

문득 갈 때마다 락스 냄새가 코를 찌르는 요양원에 계신 시할머니가 눈에 밟힌다. 증손주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이 유일한 낙(樂)인 시할머니에게 아들 데리고 자주 다니리라 다짐해 본다.

<진승미 제주도서관 사서>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