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 고춧가루 정치 풍향계
민심, 고춧가루 정치 풍향계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12.2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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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라고 한다.

소설가 황순원(2015~2000)의 단편소설 ‘내일’은 이런 사람의 마음을 들춰낸다. 소설은 대학 2학년 때 만난 소녀와의 실연(失戀)으로 시작된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보내온 그녀의 편지에는 그날 음악다방에서 만났을 때 (당신의)웃는 이쪽 잇사이에 고춧가루 낀 것이 왜 그리 더럽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고춧가루를 보고나서는 좋아하던 음악도 영 귀에 들어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이별의 편지를 받고 거리로 쏘다니면서 술만 마셨다….(중략)

집에만 틀어박혀 살았다. 그리고 병인처럼 끙끙거리다가 달려든 것이 책이었다. 사다가 책꽂이에만 두었던 원서를 하나하나 독파해나갔다….

그렇게 그 소녀를 잊었다는 게 이 소설 스토리다.

▲문제는 그 이후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명동거리를 지나다 이 소녀를 먼발치에서 보게 됐다. 그녀는 이미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아니고 긴 치마를 두른 가정부인이었다.

어떤 남자와 같이 음식점에서 나오는 길인 듯 남자는 연방 이쑤시개로 잇새를 후벼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사내의 입언저리를 정성스레 훔쳐준다. 고춧가루를 닦아준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입 주변의 고춧가루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여자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왜 그럴까.

하긴 왜 그럴까 하는 질문부터가 어리석다. 그냥 ‘그게 사람의 마음이니까’ 하는 독백이 가장 적합할 뿐이다.

좀더 유식한 사람들은 이걸 두고 ‘인간은 살아 숨쉬는 생명체’라고 표현한다. 처음부터 합리적·이성적인 원인 분석은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요즘 우리 정치 상황이 그렇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마음(표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70%를 넘은 것는 그렇다치고, 국회 의석이 100석이 훨씬 넘는 야당의 지지율은 10%대에 그치고 있는 지금 이 정치 상황이 정상일까. 이게 제대로 된 진실이라면 선거는 해보나 마나 아닌가.

그러나 보수 야권에서는 지금 국민의 마음은 숨어있다고 한다. 물론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 선택을 하리라는 믿음은 오산이다. 인간은 합리적일 때도 있고, 안 그럴때도 있다. 사실 종잡기 힘든 게 인간이니까.

그러나 지금 ‘숨은 표’를 말하는 사람들은 ‘침묵의 나선(the spiral of silence)’ 이론에서 이 정치 상황의 원인을 찾는다.

침묵의 나선이란 자신의 견해가 우세·지배 여론과 일치하면 적극 표출하고, 그렇지 않으면 침묵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원정팀을 따라가 응원할 때 주위를 살피는 심리와 같다.

▲보수 계층이 보수 야당을 떠나 주위를 살피며 숨어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보수 세력이 ‘박근혜의 질곡’에서 벗어나 새로운 단결의 명분을 찾을 때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보수는 소리없이 뭉친다’고 경고한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우리 정치는 흘러간 유행가를 다시 틀고, 같은 상황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전직 권력자들을 청산하고 그 터져나온 권력의 속살을 보면서 환호하지만 그 무대가 치워지고 나면 냉엄한 현실로 돌아오는 게 그동안의 전말이었다.

잘못 보는 것인지는 모르나 지금 이 상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명박 정권이 10년 진보 정권을 뒤로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배역이 서로 바뀌었을 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적폐 청산’도 지나치면 결국 보수 진영이 단결할 명분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잇사이에 낀 고춧가루가 싫어 떠난 소녀가 돌아와 사내의 입언저리를 닦아주는 긴 치마 입은 가정부인이 돼 있을지 모른다.

민심(民心), 정치 풍향계가 그렇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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