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우울증, 화병
한국형 우울증, 화병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12.1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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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제주일보] 우리는 억울한 일을 겪거나 정의롭지 못한 상황을 보면서 ‘울화가 치민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여기에서 ‘울화’란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일어나는 화, 즉 분노의 감정을 말한다. 이때의 분노감은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와 미쳐버릴 것 같은 충동과 우울, 불안 및 다른 신체증상들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감정이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고 누적되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 우리는 이를 ‘화병’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실제 ‘화병(hwa-byung)’이라는 용어는 정신과에서 널리 통용되는 진단체계인 ‘DSM’에서 ‘문화 관련 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 카테고리에 정식 등재되어 있는 한국형 심인성 장애이다. 실제 진료 현상에서는 우울증, 범불안장애, 공황장애, 신체형장애 등 신경증으로 진단되는 많은 환자들이 치료 초기 ‘화병’에 걸렸다며 내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중년 이상의 여성에서 많은데 남편의 외도나 음주, 가정폭력, 고부갈등, 자녀 문제 등이 증상을 유발하는 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정 또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공정함과 부당함, 분노와 관련된 부정적 감정이 표출되지 못하고 장기간 축적되고 억압된 결과 ‘화병’의 형태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대개 이런 환자들이 처음부터 정신과 치료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두통, 안면 열감, 가슴 통증, 심계항진, 소화불량, 목과 가슴의 이물감, 어지러움, 손발의 감각 이상 등과 같이 ‘화병’에서 흔히 동반되는 신체증상들로 인해 내과나 신경과, 한의원 등을 먼저 찾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신체 증상 또한 심인성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대부분 검사 상 특별한 이상이 없거나 일반적 치료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 결국 ‘신경성’이라는 말을 듣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게 된다.

치료를 진행하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우울증으로 진단되며 약물치료, 정신치료, 인지행동치료 등을 병행하여 치료하게 된다. 약물치료는 환자의 우울, 불안, 분노 등의 정서적 문제를 대상으로 항우울제, 항불안제, 기분조절제 등을 조합하여 치료하며 증상 개선에 큰 도움을 준다. 정신치료는 환자의 신체증상에 가려져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살아온 인생에 대한 인정과 공감, 지지를 통한 핵심감정의 해소를 돕는다. 인지행동치료는 왜곡된 인지부조화에 대한 교정과 분노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 방법을 훈련하게 한다.

‘화병’은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개인의 정서적 억압과 희생을 미덕으로 삼았던 우리의 전통 문화가 초래한 ‘우울증의 한국적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화병’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심리적 문제에 대해 제대로 치료 받을 수 있도록 ‘화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기대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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