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질이 만든 곽지해변 모래밭, 그 속엔 오랜 역사가…
조개껍질이 만든 곽지해변 모래밭, 그 속엔 오랜 역사가…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12.04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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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제15-B코스(한림~고내올레)-금성교~해변산책로 입구(2.0㎞)
금성리 비석군

[제주일보] # 충·효·열의 고장, 금성리

금성교는 애월읍 금성리와 한림읍 귀덕리의 경계다. 금성천의 옛 이름은 ‘정자천’으로 새별오름에서 발원해 어음리를 거쳐 내려온 어음천과 어도오름에서 발원한 금성천이 합쳐져 내려오면서 일찍부터 그 하구에 포구가 발달했으며, 한때 원군(元軍)이 주둔하게 됨으로써 목호 토벌 때 큰 피해를 입어 마을이 초토화된 적도 있었다.

금성리는 원래 이웃 곽지리와 같은 마을이었으나 1894년에 분리돼 오늘에 이른다.

올레길에서 조금 벗어나 주유소를 건너면 노인회관 입구에 비석 여섯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충효 이필완, 충효 송경천 삼부자, 충효열 장씨, 효열 진주강씨, 효열 양씨의 정려비와 함께 근래에 세운 군경 충혼비이다. 한 마을에 많은 충신, 효자, 열부가 나온 대표적인 미풍양속의 고장이다.

 

옛 금성교회

# 유서 깊은 금성교회

바닷가로 내려가다 오래된 금성교회 건물을 만났다. 이제는 동쪽으로 옮겨 크게 지었지만 제주의 첫 기도처로 알려진 마을의 유서 깊은 교회다.

초등학교 2학년 성탄절에 친구들과 선물 받으러 왔다가 받지도 못하고 바뀐 헌 신발만 신고 가 “몰명허게 뎅긴다”고 어머님께 꾸중을 들었던 예배당이다. 이곳이 세 번째 자린데, 선친 때부터 교회를 섬겨오던 김동빈 권사(뉴욕 거주)가 1994년에 대지 520평과 건축비 5억2000여 만원을 헌금해 옮겼다.

금성교회는 귀덕리 출신 항일운동가 조봉호(趙鳳鎬) 전도사가 1907년 이곳 금성리에 방을 빌려 양석봉·이도종씨 외 6명의 성도를 중심으로 첫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조 전도사는 경신학교 재학 때부터 기독교 신앙이 깊어, 1908년에 제주에 온 목사 이기풍(李基豊)과 신자 김재원·홍순흥·김행권 등과 함께 이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 곽지해변, 모래 속에 묻혔던 역사

남당머리를 넘어서는 순간 넓은 모래밭이 펼쳐진다. 이곳은 비양도와 인연이 깊다. 한 임신한 여인이 해변을 걷는데, 섬이 둥실 떠 가까이 다가와 “아! 섬이 떠 온다”고 외침으로써 이곳에 머물지 못하고 지금의 자리로 떠갔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고려 목종 2년(1002)에 터진 비양도의 화산은 엄청난 해일을 불렀고, 며칠간 밀려드는 바닷물에 아랫동네 살던 주민들은 “물이 부끈다”면서 웃동네 등으로 피신해 살았다.

그 동안 모래는 하늬바람에 불려 주택가를 덮치며 모래벌판으로 변했다가, 근래 들어 길을 뚫으며 드러난 패총 등에서 고고학계에 주목 받는 ‘곽지리식 토기’가 출토돼 역사 깊은 마을로 알려지게 됐다.

맑은 물이 솟아나는 ‘과물’은 마을의 근간을 이루는 샘이다. 그 주변이 속칭 ‘셋경개’인데, 해수욕장 서편에 바다로 돌출한 암반지대를 가리킨다. 이 암반 남쪽의 용천수가 ‘과물’로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주변 마을까지 알려지면서 가뭄에 찾기도 했다.

지금은 물 주변에 돌을 쌓아 두르고, 물 긷는 곳과 목욕하는 곳으로 나눠 여자 노천탕, 약 30m 서쪽 질 좋은 용천수가 샘솟는 곳에 남자 노천탕을 만들었다.

 

김천덕 열녀비

# 김천덕 정려비

해수욕장으로 통하는 올레길 초입에 김천덕 정려비가 서 있다. 김천덕은 조선 중기의 열녀로 재색이 뛰어났는데, 이곳 곽지의 사노 김연근(金連根)과 혼인했다. 같이 산 지 20년이 되는 해, 남편이 진상품을 수송하기 위해 항해 중 화탈도 부근에서 침몰 실종됐다. 3년 동안 조석으로 음식을 올려 남편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며 화탈도를 바라보았다.

이후 귀양 온 자가 그녀를 꾀다 실패하자 관가에 거짓을 알려 곤장 80대를 내리자 지혜롭게 처리해 위기를 면했다. 또 명월방호소의 여수(旅帥)가 권세를 믿고 그녀의 아버지를 꾀어 몰래 첩으로 삼으려 하자, 사실을 알고 목을 매어 죽으려 했으나 주위 사람들에게 발견돼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부친을 잘 모셔서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효성에도 감복했다.

그녀의 수절과 효행은 백호 임제(林悌)가 문과에 급제한 후 이를 알리려 당시 제주목사로 재임 중인 아버지 임진(林晋)에게 왔다가 그녀의 행실을 듣고 ‘김천덕전’을 지어 비로소 후세에 전해졌다. 1577년(선조 10)에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마을 물길과 안길 등 여러 곳으로 옮겨지다가 근래에 이곳에 자리 잡았다.

 

해녀상과 곽지바다.

# 곽지해수욕장

곽지해수욕장의 모래는 다른 곳의 모래와는 좀 다르다. 바위가 부서져 밀려와 쌓인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조개껍질이 부서져 이뤄진 것이다. 그래서 모래가 부드럽고 조개가 잘 자라 아이들도 가까운 곳에서 이를 많이 잡았고, 좀 더 깊은 바다에서는 대합이 많이 나 여름에 해녀들의 짭짤한 소득원이 되어왔다.

또 이곳에서는 멸치가 많이 몰려와 이를 잡는 계(契)와 같은 성격의 ‘접’들이 있었고, 멸치 떼가 들어오면 테우에 그물을 싣고 밖으로 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끌어올리는 ‘멜팟’ 풍경이 볼만했다. 근래에는 물이 맑고 넓고 얕은 해수욕장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해마다 찾아오더니, 2008년에는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전국 가보고 싶은 해수욕장 4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원(垣)을 바다와 어우러지는 수영장으로 개발해, 그곳에 여러 가지 시설을 설치해 놓고 조개잡기, 맨손 고기잡이 등 다양한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또 주변 길을 잘 정비하는 한편 노천탕, 샤워장, 야영장, 화장실, 음수대, 파고라 등 각종 편의시설 확충하면서 해수욕장 개장기간 동안 안전하고 편안한 휴식 공간을 제공해 찾는 이들에게 추억과 낭만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해변축제 때는 마을에서 생산되는 명품 브로콜리 등 야채를 홍보하는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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