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으니까
세상은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으니까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11.2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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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수능이 끝난 수험생들이 하는 얘기가 기가 막히다.

“왜 수능을 금요일 아닌 목요일에 보는 줄 알아? 다음 날 금요일에 학교 나오라고 해서 얘들이 죽었나 살았나, 어떤 사고를 쳤나 안쳤나 살펴 보려는 거야.”

지난 주말 고3 교실의 이야기다. 수능이 끝나면 바로 정답이 공개되고 대부분 수험생들은 당일 자기 성적을 거의 정확하게 알게 된다. 그런만치 희비(喜悲)는 바로 엇갈리고 수능에 실패한 아이들은 인생 최초의 아득한 절벽을 경험한다.

괴롭고 슬프고 화가 나는 건 수능에 실패한 수험생 뿐만 아니다. 이를 보는 부모의 가슴은 더 억장이 무너진다. 그 부모 마음을 누가 알랴. 수능에 실패해 좌절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은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면 알고도 남을 것이다.

▲지난 주말 어느 수험생 어머니가 딸에게 남긴 메시지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한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수능 망친 딸에게 엄마가 보낸 문자’라는 제목으로 문자 메시지 캡처본이 올라왔다. 여기에는 어머니가 삼수를 끝내고 힘들어하는 수험생 딸에게 남긴 편지가 실려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아, 너의 세 번째 수능이 끝났구나”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수능 날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들어온 딸의 모습을 보며 누구보다도 마음고생 심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구나.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한 채 대학의 문턱 앞에서 성공보단 실패와 좌절감을 먼저 알아버린 우리 딸이 안쓰럽고 가엽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엄마 아빠는 네가 명문대에, 아니 대학을 가지 않아도 좋다.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앞으로도 너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해줄 생각이다”며 딸을 격려했다.

그리고 딸에게 이런 말을 곁들였다.

“너는 인생의 낙오자가 아니다. 조금 늦게 시작할 뿐이다. 세상은 넓고 볼 것도, 먹을 것도, 느낄 것도 많단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자전적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생과 학생 중 누가 상대를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상대의 인생과 영혼에 누가 더 상처를 입히는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그 누구도 분노와 수치심 없이 어린 시절을 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섬세하고 똑똑한 소년 한스 기벤라트. 그는 학교 교장선생님과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가 선망하는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다. 요즘 말로 명문 대학이다.

그러나 심성이 여린 한스는 신학교의 과도한 경쟁과 권위주의적 분위기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 채 귀향한다. 그리고 좌절과 방황 끝에 삶의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뒤늦게 공장 대장장이 견습공이 된 그를 바라보는 고향 사람들의 눈길은 차갑다. 수레바퀴 궤도에서 이탈한 그에게 남은 건 ‘신학교에 다녔던 대장장이’라는 비웃음 뿐.

한스는 눈물 짓는다.

‘공부에 흘린 숱한 땀과 눈물, 억눌러야 했던 자그만한 기쁨들, 자부심과 공명심, 그리고 희망에 넘치는 꿈도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끊임없는 경쟁에서 밀려나 수레바퀴에 깔릴까 두려움에 떠는 게 어디 한스 뿐이랴. 우리 수험생들에겐 현재 진행형이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인격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많다. 지난 주말 수능이 끝나고 정답을 받아들고 허탈해진 수험생들 가운데도 상당수 그런 유형의 인격장애를 겪고 있을 것이다. 우리 중·고교생 100명 중 2~3명 꼴로 우울증을 보인다는 마당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학생도 전국 평균 100명당 2명 꼴이 넘는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거칠 것 없어야 할 청춘이 경쟁 탈락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잔뜩 얼룩져 있다는 얘기다.

헤르만 헤세 역시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쫓겨났지만 다시 소망을 품었다. 한 때 시계공이 되기도 했지만 글쓰기라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고 우리에게 귀중한 책을 남겼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래, 어머니 말이 맞아. 세상은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으니까.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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