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호령 巨木..."인재 키워야 제주 미래 있다"
정치권 호령 巨木..."인재 키워야 제주 미래 있다"
  • 김태형 기자
  • 승인 2017.10.22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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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정치인 남정 현오봉 선생...35세에 국회의원 당선 후 6선 대기록, 중앙무대서 맹활약
여야 간 '협상의 명수'로 인정, 고향 위해 장학재단 설립해 지속...의지의 제주인 정신으로 각인
1979년 6월 당시 한국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맨 왼쪽)이 국회를 찾아 제주 출신의 현오봉 공화당 원내총무이자 국회 운영위원장(왼쪽 세 번째)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현 위원장 옆 인물은 당시 유신정우회와 신민당 원내총무인 최영희·황낙주 의원. 

[제주일보=김태형 기자] “인재를 키우지 않으면 제주의 미래는 없다.”

변방의 섬에서 약관의 나이인 35세에 정계에 입문, 6선 국회의원으로 굴곡진 중앙 정치무대를 호령했던 정치 거목은 항상 고향 제주 발전을 위해서는 유능한 고향 출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실천했다. 제주정치사와 발전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남정(南汀) 현오봉(玄梧鳳) 선생(1923~1982년)이 그 주인공이다.

작고한 그는 정치 격변기 속에서 여당 원내총무와 정책위 의장을 비롯해 국회 운영위원장과 건설위원장 등의 중책을 맡아 국가와 고향 제주 발전을 위해 헌신한 정치 거목으로 평가받으며 변방의 섬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은 강인한 제주인 정신을 보여줬다.

 

▲제주의 소년, 정치를 꿈꾸다=일제강점기 당시 남제주군 성산면 시흥리에서 태어난 소년 현오봉은 제주북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흥국(興國)상업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청소년 강제징집을 피해 신의주에서 머물며 20대 청년으로 성장한 현오봉은 해방 이후 귀국해 능력을 인정받아 제주도 경찰감찰청 통신과장과 공보실장 등을 거쳐 1947년 하반기 상공부 광무국으로 자리를 옮겨 귀중한 공직 경험을 쌓았다.

청년 현오봉은 30대인 1953년 국내 광업계를 이끄는 대명광업개발㈜ 경영자인 정명선 사장(3대 국회의원)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후 일 년 여 만에 한국무연탄흑연㈜ 상무이사와 대명광업개발㈜ 상임감사역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촉망받는 젊은 기업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청년 현오봉은 대명광업 정명선 사장을 롤모델로 삼아 보다 큰 정치인의 꿈을 갖게 된다. 이어 35세인 1958년 제4대 국회 민의원선거 남제주군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쟁쟁한 60대 여야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만정 현오봉 선생의 국회 여야 협상 당시 모습.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변방의 섬 제주에서 현역을 꺾은 30대 젊은 정치인의 당선은 중앙에서도 화제였다. 이에 대명광업 정명선 사장과 지역주민 등의 의견을 듣고 여당인 자유당에 입당한 정치인 현오봉은 초선의원에도 여당 원내 부총무에 발탁되고 국회 상공위원회 간사와 예결위원에 잇따라 선임되면서 도내는 물론 국내 경제계의 주목을 받았다.

초선의원 현오봉의 활약은 뛰어났다. 정부에서 제주도를 제주군으로 격하시키는 ‘제주도제 폐지안’을 추진하자 여당 정책위원회 소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중앙당과 정부를 설득시켜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국회 예결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도내 숙원 사업인 일주도로 포장 예산을 확보하는가 하면 저수지 등 대규모 사회기반시설 추진의 물꼬를 텄다.

초선의원의 혈기왕성한 열정은 뜨거웠지만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이 자멸하면서 정치인 현오봉도 좌절감을 겪어야 했다. 같은 해 7월 치러진 제5대 의원선거에서 차점자로 밀려 분루를 삼켰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치러진 제6대 의원 선거에서 현오봉은 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서 당선되면서 중앙 정계에 복귀했다. 이어 7, 8대까지 3연속 지역구 당선에 이어 9대(유신정우회 소속)와 10대 지역구 당선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도내 첫 6선 국회의원 대기록을 세웠다.

관록의 정치인 현오봉은 국회 운영위원장과 건설위원장, 공화당 원내총무 및 당무위원 등을 맡는 실력자로 성장, 여야의 지속된 정치적 격돌 위기를 슬기롭게 조정하는 ‘협상의 명수’에 걸맞은 의정활동을 펼치는 거목으로 인정받으며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70년 제주장학재단의 제1학기 장학금 지급 기념 촬영. 앞줄 가운데가 만정 현오봉 선생과 강정순 여사 내외.

▲고향 제주를 키워라=정치 거목으로 인정받게 된 현오봉은 탁월한 정치력을 앞세워 고향 제주의 발전을 지원하는데도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적으로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의 각종 공공사업 지원을 위한 재산 반입 면세와 제주 개발 자재 면세 혜택을 주는 특례법을 만들었으며 항만·공항 확장과 용수 개발, 도로 개설, 감귤을 비롯한 1차산업 육성을 위한 대규모 국비 예산 확보 등에 괄목할만한 실적을 만들어냈다.

정치인 현오봉은 무엇보다 “제주 출신 인재들이 제주를 가장 잘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고향 인재 양성을 위한 제주도장학회 설립에 매진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69년 자수성가한 제주 출신 재일교포와 도내·외 재력가 등의 지원을 받아 제주장학재단이 설립됐으며 1970년 제1학기 장학생을 시작으로 올해 상반기까지 총 94회에 걸쳐 도내 출신 대학생 7051명에게 총 45억여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는 결실이 이어지고 있다.

제주장학재단은 “복지 제주건설의 백년대계는 교육진흥에 있다고 확신한다”는 남정 현오봉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그의 부인인 강정순 여사(2003년 작고)를 거쳐 차남인 현왕수 현 이사장이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어느덧 반세기의 세월을 앞두고 있다.

그렇게 거목의 정치인 현오봉은 1979년 10·26 사태 이후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함께 정치활동 규제 대상자로 포함된 후 1982년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주인으로서 고향 제주를 가슴에 품고 지냈다.

서울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현왕수 제주장학재단 이사장은 “부친은 인간적으로 성실함과 열정적인 삶을 살면서 청렴결백함과 순정의 마음으로 정치를 하셨다”면서 “제주 발전을 위한 최우선 요인이 인재 육성이라는 점을 깨닫고 실천한 부친의 뜻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피력했다.

김태형 기자  sumbad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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