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번호를 잘 기억하고 있을까
핸드폰 번호를 잘 기억하고 있을까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10.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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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지난 여름 벌초 때 일이다. 모두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는데 한 친척 어른이 어머니의 안부와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 그 순간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조차 이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핸드폰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 번호를 열고서야 어머니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는 얼굴이 나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

누구나 갑자기 묻는 것에는 생각나지 않는 것이 많기는 하다. 하지만 어머니 핸드폰 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허둥대는 내 꼴을 그때 그 친척 어른은 어떻게 보았을까. 생각할수록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나는 전화번호가 얼마나 되나 하고 세었더니 5~6개 정도뿐이었다. 그것도 쥐어짜듯 오래 생각한 끝에.

옛날에는 제법 많은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한숨이 절로 났다.

▲기억력과 관련해 우리는 다소 이중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 기술 발달로 데이터 처리·보존 능력은 거의 무한대로 늘어났지만 어떤 부분에선 심각한 기억 상실을 겪고 있다.

어느날 문득 며칠 전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 경험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때문에 개인이든 집단이든 과거의 일이 지워지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다니지만 한편으론 요즘처럼 과거가 제대로 기억되지 않았던 때도 없었다.

한 개인의 정체성만 해도 그렇다. 과거와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그 정체가 만들어지던 시대는 지났다. 어제 빛나는 성과가 있다 할지라도 오늘에 실패하면 그대로 침몰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올해 타계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시대는 공고(鞏固)한 것 없이 빠르게 변하고 어제의 성취를 잊고 재성취를 거듭해야 하는 ‘망각(忘却)의 문화’ 속에 있다고 한 것이다.

▲핸드폰 번호를 잊어버리는 나에게 위안을 준 것은 ‘망각의 힘’(도야마 시게히코, 김은경 옮김)이란 책이었다.

도야마는 많은 것들을 기억하기보다는 망각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음식을 너무 먹으면 소화불량을 가져오지 않은가.

몸에 좋은 것은 적당한 공복(空腹)상태다. 경쾌한 공복상태를 만들기 위해선 먹은 것을 소화시켜 몸에 꼭 필요한 에너지만 남기고 모두 배설해야 한다.

도야마는 “망각은 머릿속에 일어나는 배설작용”이라고 말한다.

기억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는 것을 무조건 많이 머리에 보관할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남겨놓고 대부분 잊어버리는 ‘선택지적 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하려 하기보다는 망각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효율적인 망각은 지극히 현대적인 문제인 것 같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기억력이 쌩쌩해 과거를 하나도 잊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전(前) 박근혜 정부 때는 물론이고, 전전(前前) 이명박 정부, 전전전(前前前) 노무현 정부, 전전전전(前前前前) 김대중 정부, 그리고 심지어 박정희·이승만 정부 때까지 파고드는 유례없는 과거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여당의 ‘적폐청산’과 야당의 ‘정치보복’ 프레임이 충돌하면서부터 예상은 했었다.

늘 그렇듯이 과거와 싸우면 잃는 것은 미래다. 우리 정치인들은 주위 사람들의 핸드폰 번호를 잘 기억하고 있을까.

이반 이스쿠이에르두가 “민주주의는 좋은 기억력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망각의 기술, 김순영 옮김)

하지만 좋은 기억력을 이용해 이렇게 정치판을 난장판을 만들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정치권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과거 얘기 뿐이다. 미래를 설계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 이 나라는 국내·외적으로 경제나 안보나 모두 힘들고 어렵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살펴야지 미래를 희생하면서 과거를 돌아봐서 도대체 뭘 하자는 건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 얘기를 듣고 싶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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