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들고 지는 사연을 들어보면
단풍이 들고 지는 사연을 들어보면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10.1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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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한라산에 달려온 단풍 소식에 마음이 먼저 붉어진다. 가을은 산따라 온다고 하던가. 금강산, 아니 그 가을의 이름 ‘단풍 풍(楓), 큰산 악(嶽)’에서 시작한 단풍은 설악산·오대산·치악산·월악산·속리산·내장산·가야산·지리산·무등산·두륜산까지 잇는다.

잠시 멈췄다가 바다 건너 한라산에 점을 찍는다. 간혹 이 순서가 달라진다고 해서 ‘단풍 샛길’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북한산보다 지리산이 먼저, 또 가야산·두륜산보다 한라산이 먼저 물들 수 있으니까.

가을산 전체가 홍엽(紅葉)을 이루면 산에 간 사람의 마음도 단풍이 든다. ‘단풍이 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고 한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한라산 단풍은 내일(17일)부터라고 한다. 올 여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지난해보다 5일 정도 늦어졌다.

▲올 단풍이 예년보다 더 고우니 덜 고우니 하는 말은 믿고 싶지 않다. 산보다 마음에 먼저 단풍이 물들었는데 곱기를 따진들 무슨 의미 있으랴.

한라산에 맨 먼저 단풍이 드는 곳은 삼각봉 대피소에서 용진각 현수교 건너 왕관능에 이르는 계곡이다. 이 단풍의 이동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가야산 두륜산에서 하루 25㎞씩 남행해서 한라산 삼각봉에 다다른 단풍은 내일부터 산 아래쪽으로 하루 40m 정도씩 내려올 것이다. 그래서 이달 말께면 이 단풍이 영실기암 계곡과 탐라계곡에서 절정을 이룰 것이다. 이게 가을의 속도다. 한라산 단풍은 혼자 가서 보다 와도 좋다.

가을날 해질 무렵, 석양이 바위를 붉게 물들일 때면 금빛으로 빛나는 왕관능 바위 사이사이로 짙게 흐르는 색깔이 있다. 아이가 胎中(태중)에서 막 빠져 나올 때 맨 먼저 보는 색깔. 우리 무의식 속에 살아 숨쉬는 으뜸과 신성, 열정과 사랑, 환희와 행운의 ‘빨강’이다.

▲그 뿐이랴. 산길은 온통 단풍 카펫을 깔아놓은 듯해서 밟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이다. 언제 이 번잡한 세상 시름을 안고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가 싶겠지.

단풍 사이로 하늘을 들여다 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배는 듯하고 눈부신 단풍에 달빛이 비치고, 풀벌레 소리까지 자지러지면 가을산은 이미 이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어려운 살림에 어디 한가하게 단풍놀이 할 마음이나 생기겠는가.

지난달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서민생활 안정정책에 대한 국민의견 조사’에 따르면 국민은 정부의 서민생활 안정대책에 대해 60.4%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정부가 역점을 둬야 할 정책 분야는 ‘일자리 만들기, 고용불안 해소 등 고용대책’을 꼽았다. 또 대다수 국민이 정확한 실태 파악에 토대를 둔 고용대책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가슴 아픈 주문을 했다. 한마디로 어렵고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산은 만산홍(滿山紅). 으뜸·신성·열정·사랑·환희·행운으로 가득한데, 국민의 삶은 이렇게 팍팍하다.

▲초록이 지치면 단풍이 든다고. 단풍이 한창일 때면 문득 세월의 흐름을 느끼면서 괜히 가슴이 ‘철렁’한다는 이들도 있다. 경기침체 조짐에 실업난, 안보 불안, 계속되는 정치 혼란까지 올해 가을은 유독 마음둘 곳이 마땅찮다. 이런 때일수록 근심·걱정 멀찍이 밀어놓고 가을 이야기나 만들어볼 일이다. 가을이 있는 것은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라는 자연의 신호다.

“단풍잎을 떨궈 추위를 이겨낸 후 다시 새 잎을 피우리라.”

단풍이 들고 지는 사연을 들어보면 세상이 다시 보일 것이다. ‘시들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도 한다.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붉다’(당나라 시인 杜牧)고 하지 않는가. ‘힐링’하러 산에 갔다가 ‘킬링’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도 이 가을 세상사 시름 다 내려놓고 꽃보다 붉은 ‘빨강’ 단풍에 흠뻑 젖어나 볼까. 인생의 빛깔도 서리를 맞아야 더 붉어짐을 이제는 알았으니까.

사는 동안 외로움의 방패가 될 수 있는 사람과 산을 찾아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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