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꽃가지가 휘어지기 시작하면
달빛에 꽃가지가 휘어지기 시작하면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9.2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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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제주시 전농로 길에는 낙엽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여름 내내 푸르렀던 벗나무들 귀밑머리에 새치머리처럼 노랗게 물든 잎새들이 성성히 달려있다. 해가 짧아졌는지 오전 5시30분인데도 어둑어둑하다.

기온도 뚝 떨어져 짧은 팔 운동복 속으로 한기가 드는 느낌이다. 추석(秋夕) 연휴가 시작되는 올 주말부터는 아침 최저 기온이 19도로 훨씬 더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금방 이 가을이 지나면 한파(寒波)가 오겠지.

지난 여름이 뜨겁고 밤이 무더웠던 만큼 올 겨울은 추위로 얼어붙을 것이다. 벌써부터 추위보다 더한 냉소와 조롱, 힐난의 칼 바람까지 겹쳐 나라 전체가 굳고 있으니까. 경제 문제만이 아니다. 북한 핵 사태와 관련한 나라 밖의 시선은 더 차갑다.

▲아침 운동길은 전농로에서 보성시장 안길로 접어들었다. 여기 저기에 일감을 찾아 새벽에 모여든 일용 노무자들이 북적북적하다.

일부는 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고 또 일부는 끼리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지만 표정은 무겁고 어둡다.

광양성당 뒷길을 지나쳐 삼성혈 입구 횡단보도를 건너면 또 다시 무리를 이룬 일용 노무자들을 마주친다. 이들 앞에만 서면 아침 운동도 사치(奢侈)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빠른 걸음으로 이들 앞을 지나가는데 싸늘한 한기(寒氣)가 등 뒤를 따라붙는다. 무엇이 우리를 한기 속으로 밀어넣는 것일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6시30분이다. 이 시간, 거리엔 청소차와 살수차가 지나간 뒤에 음식물 쓰레기 수거차가 냄새를 풍기면서 달린다. 일감을 찾아 떠난 노무자들의 텅빈 자리가 있고, 일감을 못 찾은 사람들의 새벽 막걸리가 창백하게 이어지고 있다.

▲머지 않아 전농로에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아스팔트 도로를 모두 메워 버릴 것이다. 첫 서리가 내릴 때쯤 한라산 단풍도 다 익을 테고.

동녘이 트는 전농로에 낙엽지는 소리는 또 어떨까.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근 빗방울로 잘못 알고 밖에 나가보라고 했더니 나뭇가지에 달이 걸려 있었다는 송강(松江) 정철의 옛 시는 한 폭의 수묵화다.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어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 거렸네.’

미당 서정주의 시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다.

한가위는 달빛이 가장 좋은 가을의 한가운데 달이자 팔월(음력)의 한가운데 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리길도 마다않고 고향으로 간다. 고향길이야 순하디 순하게 굽어서 눈을 감아도 갈 수 있다고 하니까.

▲보성시장 아침 사람들도, 삼성혈에서 사라봉 입구의 새벽 사람들도 올 추석에는 고향엘 가서 밝은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이번 주에 나뭇가지에 달이 걸리고, 달빛에 꽃가지가 휘어지기 시작하면 남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말 일이다.

어디에서는 멀건 시래기 국에서, 새벽 거리의 막걸리 잔에서 달을 건져내는 사람들이 있고 달빛 가득한 빈 사발에 얼굴을 비춰보는 외로운 이도 있을 것이다.

서로 찔러대는 가시돋친 말도 추석 달처럼 둥굴둥굴해지면 좋겠다. 세상의 먼지가 짙을수록, 나라 안팎이 어지러울수록, 체감 기온이 낮을수록 우리 삶의 뿌리를 돌아볼 일이다.

지금 어려운 건 사람을 쓰는 사람이나 거기에 일하러 가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다.

이럴 때 고향 달이 보고픈 사람들에게 “차비나 혀라”고 쥐어주면 대보름달이 좋아라 소리내어 깔깔 웃을 것이다.

이 가을엔 잠시 여유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성찰이 중요하다. 곧 추석 달이 휘영청 뜰 것이다. 과수원 길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사이에도 노랗게 익어가는 작은 달이 뜬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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