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만세" 외친 소녀…제주교육 선구자 되다
"독립 만세" 외친 소녀…제주교육 선구자 되다
  • 박미예 기자
  • 승인 2017.09.24 1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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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초대 제주교육감 최정숙
초대 제주도교육감 취임식에서 최정숙 교육감이 선서를 하고 있다.

[제주일보=박미예 기자] ‘사회적 약자였던 근대 여성의 몸으로 파란만장한 역경을 이겨내 제주교육의 뿌리를 심고, 독립운동에 이어 희생·박애를 실천해 제주 여성인의 강인한 정신을 빛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격랑의 역사 속에서 여성이라는 성차별을 극복하고 제주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텃밭을 일군 여성 제주인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제주도 초대 교육감을 지낸 최정숙 선생(崔貞淑, 1902~1977)이 그 주인공으로, 돌아가신 후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선생이 걸었던 생애는 본받고 계승해야 할 불굴의 제주인 정신으로 조명을 받고 있다.

▲포기를 모르는 집념의 제주 소녀, 교육의 씨앗을 품다= 최정숙은 1902년 2월 10일 제주시 삼도동에서 6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초대 제주지방법원 법원장을 지낸 최원순(崔元淳)이다.

최정숙은 여덟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신설된 신성여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형성된 가치관은 이후 삶의 본바탕을 이루게 된다.

당시 교사였던 수녀들에게 감화돼 열두 살 때 세례를 받은 최정숙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수도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1914년 신성여학교 1회 졸업 후 소녀는 고등 진학에 완강히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단식투쟁까지 벌인 끝에 결국 허락을 얻어내 서울 경성사립진명여자고등학교에 편입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 때 쓴 편지만 수백 통에 달한다”고 적었다.

▲억눌린 애국심, 독립운동으로 피어나다= 최정숙은 1919년 초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재학하던 중 고종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추모 인파가 모인 덕수궁 대한문을 다녀온다. 그러나 학교측에 이 사실이 발각돼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크게 벌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

이 사건은 그의 애국심을 촉발시키는 밑거름으로 작용했고, 조국을 침략한 일제에 대한 분노가 실제적 구국운동으로 확대됐다.

곧바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 선생과의 접촉을 통해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최은희 등을 주축으로 한 79명의 소녀결사대가 만들어졌다. 소녀결사대는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속옷에 주소, 이름, 학교, 고향 등을 적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파고다공원으로 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최정숙은 시위 현장에서 일본헌병에 붙들려 여성독립운동 주동자로 낙인찍힌 뒤 약 7개월(추정)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지병을 얻고 수녀의 꿈도 이룰 수 없게 됐지만 후회는 없었다.

친구 강평국과 최정숙

▲여학교 설립…무보수 교장직을 맡다= 고향 제주로 내려온 최정숙은 무지를 일깨우는 일이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여수원, 명신학교 등을 세워 부녀자와 문맹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는 여성 교육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최정숙은 친구인 강평국 등과 함께 발로 뛰어다니며 학업에 뜻이 있어도 공부를 하지 못했던 여성들을 교실로 이끌었다.

그러나 과로로 건강이 악화된 최정숙은 제주를 떠나 치료를 받아야 했고, 교사로 일하다가 37세의 나이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944년 제주에서 ‘정화의원’을 개원한다.

그는 가난으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도민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미였던 당시 군인 30~40명이 매일같이 찾아와 무료 음식과 치료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쌀을 살 돈마저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전답까지 팔아 운영비를 마련하면서 약자를 보살폈다.

그러다 조국 광복을 맞게 되자 최정숙은 신성여중·고 설립 운동에 나서 꿈을 이룬 후 초대 교장직을 맡아 퇴임 때까지 무보수로 일했다. 이런 봉사활동은 수녀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에게 로마교황훈장(1954년) 수훈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1954년 로마교황훈장을 받는 최정숙 선생(왼쪽).

▲초대 제주도교육감…정신적 유산 남겨= 최정숙은 1964년 초대 제주도교육감이자 전국 첫 여성 교육감으로 선출되며 제주 여성인의 강인함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4년간의 교육감 재임기간 동안 공직기강 확립과 함께 도내 교육시설 확장, 실업여고 신설, 도서관 붐, 해외동포 대상 각 학교 풍금 보내기 운동, 인사교류 사업 등 제주 교육의 기틀을 쌓는데 전념했다.

제주교육의 선구자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였지만 교육감 임기를 마친 후에는 거주처가 없어 천주교에서 빌려준 집에 살 정도로 청렴결백한 생활을 보낸다.

“다른 사람들은 학교장, 병원장, 교육감을 역임한 내가 집 한 칸도 없다면 비웃을 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 돈 벌 기회가 없었다. 병원을 개원했지만 군속들을 돕다보니 오히려 곤란을 받아야 했고, 30여 년간 교직에 몸담아왔지만 무보수로 일해 왔기 때문에 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교육감 월급을 받을 때 겨우 생활에 불편이 없었을 뿐이랄까.”(1973년 10월 8일자 제남신문 회고록 중.)

그는 1977년 2월 22일 7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영결식은 그가 오랜 기간 근무했던 신성여중·고에서 제주도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최정숙이 생전 친자식처럼 사랑한 양아들 안흥찬 옹(87세·제주 산악인 1세대)은 “피난을 가며 제주를 떠난 친모의 친구였던 어머니(최정숙)와의 인연은 감사할 따름으로, 어머니를 도와 무보수로 학교 체육교사를 맡았던 기억이 난다”며 “어머니는 물려줄 재산 한 푼 없이 돌아가셨지만 그의 성품과 교양, 가정에서의 교육이 저에게는 무엇보다 큰 재산으로 남았다”고 회고했다.

박미예 기자  my@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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