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코무덤서 만난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
적막한 코무덤서 만난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9.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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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덤과 조선일기(朝鮮日記)
조선일기(朝鮮日記·필사본)에 수록된 조선인 수급 숫자 언급 부분.

[제주일보] 지난 7월 무더위가 한창일 때 교토와 오사카 골동(벼룩)시장을 혼자서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볼거리가 많은 교토지만 여럿이 함께 가면 매번 가본 곳만 가게 마련이다. 처음 간 지인에게 유명한 곳은 안 가고 내 가고픈 곳만 가자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정이 빈 이틀 동안 그간 기회만 보고 있던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1순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무덤(豊國廟)이었다. 교토여자대학을 가로 질러 아미타봉을 향해 오르다 보면 489개의 계단을 오르게 되고, 드디어 오륜석탑이 나타나는 데 그게 바로 그의 무덤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1615년 도요토미 가문이 망한 후 파괴되어 아무도 찾는 이 없던 무덤이 1897년 그의 사망 300주기를 맞아 육중한 오륜석탑으로 복원된 것이다. 메이지(明治)시대의 정치적 필요성이 없었다면 그나마도 없었을지 모른다.

한동안 버림 받았던 에도(江戶)시대와 마찬가지로 내가 그의 무덤을 찾았던 날도 마주친 이는 오르는 길에 두 사람... 내려오는 길에 한 사람... 그리움이 아닌 사무침으로 그의 무덤을 찾는 우리네를 빼면 더 적막한 곳이리라.(오르는 길에 스쳐간 사람들도 우리네 사람이었다.)

나의 발길은 다시 그의 무덤 서쪽 옛 호코지(方廣寺) 대불전 자리에 1880년 만들어진 그의 사당인 도요쿠니진쟈(豊國神社)로 향했지만, 나의 눈길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코무덤(鼻塚)에 고정되어 있었다. 교토에 갈 때마다 가는 곳이지만 늘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코무덤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자 뜻밖에도 중국친구였다. 그 친구는 그 전날도 왔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저 '단순하게 인류애가 깊은 친구구나'라고만 생각했다가, 코무덤에는 그의 조상님들인 명나라 사람의 코도 합장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사실은 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오코우치 히데토모(大河內秀元)가 귀환할 때까지의 사실을 말년인 1663년 정리한 '조선일기(朝鮮日記)' 속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人(조선인) 18만5738명과 大明人(명나라인) 2만9014명 등 합계 21만4752명의 首級(수급.여기서는 코를 말함)을 平安城(헤이안죠.지금의 京都) 동쪽 대불전 근처에 매장하고 석탑을 세웠다’고 기록한 게 바로 그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전사자가 아닌 민간인... 죽은 이뿐만 아니라 산 사람들의 코도 베어가서 수십년 동안 코가 없는 조선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는 사실(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과 스스로도 코를 베어간 게 너무 야만적이라고 코무덤을 귀무덤(耳塚)이라고 부르는 일 등을 함께 얘기하며, ‘코베기’의 야만성과 ‘눈가리고 아웅’식의 역사미화에 대해 서로 공감했다.

그 친구는 그래도 코무덤에 올 때마다 만날 수 있는 한국사람들의 역사의식이 부럽단다. 그 친구의 지인 가운데 이 무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직접 찾아오는 이는 더욱 적다고...우리 앞을 무심히 지나는 한 무리의 중국 관광객들을 가리키며 한숨을 쉬었다.

엊그제 입수된 “조선일기”를 살펴보다 나의 눈길이 다시 ‘朝鮮人(조선인) 18만5738명’에서 멈춰진다.

올 여름 그 무더운 날.. 왜 그리도 코가 시리고 귀가 시렸던지....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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