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아이 맨몸 적시던 ‘젖줄’…제주사람의 ‘삶터’
어른 아이 맨몸 적시던 ‘젖줄’…제주사람의 ‘삶터’
  • 고현영 기자
  • 승인 2017.09.19 1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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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 끼고 있어 선진문물 유입 관문…한때 공공기관·공장 등 밀집 ‘요지’
밀물 때 산지항에 10척 남짓한 배가 들어와 있는 풍경. 1890년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제주성의 전체 성곽을 볼 수 있다.

[제주일보=고현영 기자] #탑동에서 제주항 방면으로 뚜벅뚜벅 걷다 만난 갈림길.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곳은 중국 피난선을 재현해 전시공간으로 활용되던 곳이다. 1947년 중국이 국공내전을 치를 때 중국인 54명이 피난선(해상호)을 타고 랴오닝성을 출발해 1948년 인천에 입항했다. 인천에서 2년 여간 피난생활을 한 그들은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다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배의 일부가 파손되면서 인명피해도 발생해 제주 산지천, 바로 이곳에 정박하게 됐다. 그때가 1950년 8월이다. 이들이 제주에 정착하며 화교의 뿌리가 됐다.

 

1950년 산지천 하류로 예인돼 정박하게 된 중국 피난선 해상호.이 배에 탔던 중국인들이 제주에 정착하며 화교의 뿌리가 됐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모퉁이를 끼고 돌면 ‘김만덕기념관’이 있다. 거상 김만덕(1739~1812)은 조선시대 상인으로 최초의 여성 CEO다.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기부해 제주도 백성을 구제했다. 제주에서는 의녀(義女)로 불린다.

#기념관 옆으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새빨간 건물.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2’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흡수한 옛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은 이 현대식 건물은 그렇지만 생소하거나 낯설지 않다. 오히려 제주가 지키고자 하는 전통과 현대의 변화 사이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가교로서 충분해 보인다.

#그 옆으로는 김만덕객주가 자리하고 있다. 제주의 전통 가옥인 초가집으로 꾸려진 이곳은 순대백반, 해물파전 등의 전통음식과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일 수 있는 현대판 ‘주막’이다.

이들은 모두 산지천을 끼고 자리해 있다. 누군가에게는 위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피난처였고, 또 어떤 이에게는 문화예술의 발상지였으며 다른 이에겐 ‘나눔’을 공유하던 곳이 바로 산지천이었다. 이곳 산지천은 항을 끼고 있어 당시 새로운 문물의 유입로이기도 했지만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롭지만도 못했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1950년대 말 한여름날의 산지천 하류.
썰물때에 맞춰 왁자하게 나온 아이들이 바릇을 잡고 있다.
당시 산지천은 제주도민의 삶터였고,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없이 맨몸을 적시던 순수의 공간이었다.

산지천은 병문천(屛門川), 한천(漢川)과 더불어 제주시의 3대 하천으로 여겨져 왔다. 삼의악과 관음사 일대의 570m 지점에서 산지포구까지 10.3㎞에 달하는 제주의 젖줄이기도 하다. 동문로터리에서 포구까지 500m 구간에는 가라쿳물, 산짓물, 지장샘 등의 용출수가 풍부해서 예로부터 식수터로 이용됐다. 대부분이 건천이었던 제주에서 산지천은 제주인들에게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물이 풍부해서 산지천을 따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돛단배들이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올 수 있어 포구로 이용됐을 정도로 주민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셈이다.산지천을 주변으로 제주세관과 한국외자관리청관을 비롯해 단추공장, 담배·소금·성냥 보급소, 통조림 공장 등이 밀집해 있었던 것만 봐도 행정·경제의 요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곳 산지천에서는 삼삼오오 짝을 이뤄 멱을 감거나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 피우며 빨래하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1970년대 산지로. 산지항과 연결되는 산지로는 오랜 세월 도민과 애환을 같이 해 온 주요 도로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산지천 복개공사가 추진됐는데, 산지천내에 기둥골조가 세월지고 있는 것으로 봐 매립공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이전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산지천을 따라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서게 됐고 이에 따른 생활오수와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이곳은 1966년 복개 공사 기공식을 가졌으며 2002년 6월 현재의 자연생태하천으로 거듭났다.

하류 구간인 제주시 일도2동 동문교에서 건입동 용진교 구간(너비 474m, 너비 21~36m)은 1966년 10월부터 1996년 2월까지 약 30여 년간 복개돼 주상복합지구로 이용됐다.

당시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문은 1966년 10월 6일자 보도를 통해 전날(5일) 이뤄진 산지천 복개공사 기공식을 보도하기도 했다.

탐라문화광장으로 새옷을 갈아입은 산지천 일대에서 오늘(20일)부터 제56회 탐라문화제가 열린다. 그동안 탑동광장에서 개최되던 탐라문화제가 제주 성내의 젖줄 위에서 제주 천년의 문화꽃을 다시 피워낸다.

제주성 내 중심지였던 산지천이 당시의 ‘명성’을 잇기 위해 꿈틀거린다. 여러 갈래로 퍼져 있던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그들의 삶과 역사·문화가 한 줄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잠시 회색빛이었던 도시가 문화예술을 가미한 낭만과 추억으로 자신의 색을 찾아갈 시간이 머지않았음이라.

천천히, 느리게 걸으며 원도심에 색을 입히자. 그리고 그 향기를 느끼는 순간 제주가 천천히 일어날 것이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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