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바람이 전하는 걱정
여름의 끝, 바람이 전하는 걱정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9.1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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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제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논설위원

[제주일보] 저녁에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소고기 뭇국을 끓여 여름내 지친 속을 달래보기로 했다.

마트로 가는 동안 하늘이 선풍기를 틀었는지(약풍쯤으로 맞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기온이 조금만 올라도 에어컨을 켜고 조금만 내려도 난방기에 의지하며 온통 가전제품에 둘러싸여 사느라 나도 모르게 비유의 주객이 바뀐다. 선풍기 바람이 자연풍을 닮은 게 아니라 이 산들바람이 선풍기 약풍을 닮았다니….

올 여름은 태풍이 제주를 비켜갔다. 기상청이 두어 번 태풍의 길목인 제주가 직·간접 영향권에 들 거라 호들갑을 떨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일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릴 적에는 학교를 하루쯤 쉬게 하는 자연현상에 불과하고 교직에 몸담고 있는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없지만 어른이 되고부터는 태풍이 영 켕기는 게 아니다.

창문을 꼭꼭 닫고 비가 새는 문틈 사이는 걸레로 막고 가끔은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유리창에 X자로 청테이프를 붙여보기도 하고, 얼른 지나가거라 잔뜩 긴장한 채 몇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별로 달갑지 않다.

8월 말 9월 초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던 녀석이 올해는 아직 소식이 없고 대신에 불기둥을 뿜어내며 멀대같은 것이 하늘로 치솟고 그 반작용으로 지상에 분출하는 가스와 불, 흙먼지가 뒤범벅이 된 동심원 구름이 내 눈에는 태풍의 소용돌이로 보인다.

쌓이고 쌓인 열기가, 에너지가, 갈등이, 증오와 어리석음이 어느 날 하나로 응축된 게 태풍이 아닌가.

마트에 들어가 소고기를 반근 끊고 대파를 바구니에 집어넣고 무가 쌓여있는 쪽으로 간다. 큼지막하고 싱싱하게 보이는 무를 하나 들어본다. 뿌리 쪽이 하얗고 줄기와 잎, 무청 쪽이 파란 것은 광합성에 유리해서리라.

여느 때면 갓 태어난 조카를 안은 것 같다거나 볼링의 핀 같다거나 이도 아니면 볼링을 치는 누구의 종아리 같다고 비유해서 항의를 받을 텐데 오늘은 무가 전혀 다르게 보인다. 꼭 포탄 같다. 군 경험이 전혀 없는 여자의 눈에도 무가 어쩔 수 없이 박격포 포탄처럼 보이는 건 신경과민일까.

병사들이 무를 포신에 집어넣는다. 잠시 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무가 하늘을 날아간다.

무는 처음에는 동해에 떨어지더니 일본열도를 가로지르고 서태평양 괌을 에워싸고 급기야 태평양을 건너 미 대륙 쪽으로 날아간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포탄이 무처럼 보여야 할 것을 무가 포탄처럼 보이다니….

소고기를 다져 물에 끓이다 이 무를 나박 썰어 넣고 양념을 쳐주면 맛있는 소고기 뭇국이 될 것이다. 나는 계산을 하고 마트를 빠져나온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인공적으로 기온을 조절하는 마트보다 자연스레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당연히 살갑다.

한 편으론 누구라도 붙들고 ‘이 가을이 얼마나 좋아요’ 묻고 싶지만 마음 한 켠은 어둡기만 하다.

이렇게 좋은 가을 뒤편에 겨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내 마음을 언짢게 하는 것이다. 이 다가오는 가을에 아무 생각 없이 학생들과 공부만 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일까.

겨울엔 몸도 움츠려지고 덩달아 마음도 생각도 경색된다. 하여 겨울엔 내내 적도 너머로 달아난 애인을 그리워하듯 봄과 여름을 동경했건만….

아무리 더워도 여름은 정열적이고 화려한 맛으로 참을 만하다 싶었더니 나이가 들어가는 건지 시대 탓인지 몸과 마음을 녹초로 만드는 여름도 이젠 싫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겨울 걱정 없이 가을을 맞이할 순 없는 모양이다. 무를 담은 봉투가 묵직하게 시대의 무게처럼 오른팔에 전해져온다. 여름 뒤끝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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