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에 미쳐 살던 섬소년, 세계적 무용가로 '날개짓'
춤에 미쳐 살던 섬소년, 세계적 무용가로 '날개짓'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7.09.10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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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현대무용가 김설진
벨기에 ‘피핑톰’ 단원으로 맹활약
무용·연극 경계 오가는 천재적 표현
외신에선 ‘찰리 채플린 능가’ 평가도
김설진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세계적인 현대무용단인 벨기에 피핑톰의 무용단원이며 조안무이기도 하다. 현대무용단 ‘무버’를 이끌고 있다. 인화초등학교와 제주제일중, 영주고를 거쳐 서울예술대, 한예종을 졸업했다. ‘문제아’소리를 들으며 스트릿댄스로 대중음악 안무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케이블방송의 유명댄싱대회에서 우승하며 대중적 관심을 받고 있으며 국내외 무대에서 보여준 빼어난 실력은 ‘찰리채플린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사진=㈜케이문에프엔디 제공>

[제주일보=변경혜 기자] 

김설진(37), 어느덧 그의 이름 옆엔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 안무연출가가 자연스럽다. 무대 위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관객들은 열광하며 ‘천재적 표현’이란 말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세계무대에서 현대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오가며 감동을 만들어내는 그의 탁월함에 외신에선 ‘찰리채플린을 능가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한국 현대무용계에서 드물게 팬덤을 형성하고 김설진을 만나자 초등학교 때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밤새 춤에 빠져있던 시절부터 이야기한다.


“춤 연습을 할 만한 곳이 신산공원, 종합경기장 정도였는데, 춤을 출 때면 어김없이 경찰관 아저씨들이 나타났었지요. 늘 문제아 취급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죠”

김설진이 10대 시절 부모와 학교의 눈을 피해 춤 연습을 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시절 같은 학년끼리 학교운동장에서 했던 단체야영에서 장기자랑이 첫 무대였던 그는 자정이 넘도록 춤연습을 하기 일쑤였고 옷은 늘 땀으로 흥건했다. 연습실은커녕 야외공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던 그는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곤 늘 팝핀, 비보잉, 힙합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동작과 기술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였다. 하지만 제주에선 실력을 검증받을 만한 마땅한 대회조차 없었다.

한국무용을 접했던 그의 어머니는 ‘무용과 춤은 다르다’며 한사코 스트릿댄스를 반대하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서울에서 열리는 오디션행을 허락했다.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하면 춤을 포기하겠지’라는 어머니의 예상과 달리 김설진의 첫 번째 도전은 합격이었고, 제주섬 소년의 서울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른 사람들의 춤을 보면 ‘내가 제일 못하는 구나…’라는 생각에 주눅이 많아 들었지요”

Photo by Baki.

김설진은 그럴 때마다 더 혹독한 연습으로 자신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서울예술대학’의 현대무용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창작공부는 그에겐 두 번째 도전이었다.

대학 입학 후 난생 처음 발레의 바(지지대)를 보며 ‘왜 옷걸이가 이렇게 길게 있지?’하는 의문을 가질 만큼 현대무용과 거리가 멀었던 그였기에 학교생활은 그를 연습벌레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계시고,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 주시잖아요. 처음엔 자는 시간 빼곤 정말 연습만 했던 것 같아요”

세 번째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생활을 마치고 당시 신진예술가지원지금을 받고 유럽연수에 나섰다. 일정을 꼼꼼히 챙기며 꿈에 그리던 벨기에 무용단 ‘피핑톰(PEEPING TOM)의 오디션을 보리라’는 계획이었다. 아뿔사! 그러나 그가 벨기에에 도착할 즈음 오디션은 예정보다 일찍 끝나 있었다.

“정말, 한숨 밖에 안나왔죠.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하고 우울해하면서 인근에서 다른 교육프로그램을 받고 있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외국인 친구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일주일 후에 또 오디션이 있다는 거예요.”

김설진의 세 번째 도전은 대성공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흘린 땀은 세계적 무용단인 ‘피핑 톰’ 오디션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켰다. 항공요금문제로 최종오디션을 남겨놓고 돌아가야 할 처지였던 그를 최종합격자로 결정한 것.

그에 화답하듯 김설진의 활약이 이어졌다. 특히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올려진 ‘반덴브란데 32번지’ ‘아-루에’는 현대무용계에 ‘김설진’이란 이름을 새겨놓았다. 팀에서 조안무로도 인정받아왔다. 2014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인기케이블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적 관심을 받은 그는 방송과 공연무대에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들어 각종 매스컴에서 유명세를 실감하느냐는 말에 김설진은 천재 발레리노 니진스키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파리에 가면 아직도 니진스키의 동상 앞에 꽃이 놓여져 있어요. 그가 무대에 선 시간은 10년 남짓이지만 무용수로 영원히 살고 있지요. 예전엔 표현을 하면서 근육의 질감이나 뼈의 움직임, 효율성 이런 것들이 관심이었다면 요즘엔 무대에서의 걸음걸이 하나에도 더 신경이 쓰입니다. 사람마다 가지는 삶의 무게가 내딛는 걸음걸이나, 순간의 뒷모습마다 다름을 느끼고 있지요. ‘비효율적인 움직임이면 어때?’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슬럼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케이문에프엔디 제공

프랑스 아비뇽축제처럼 제주에서 댄스페스티벌 아이디어를 여러차례 얘기한 것에 대해 묻자 그는 “아비뇽이나 비엔나 페스티벌엔 세계적인 안무가들이 몰려옵니다. 그 지역은 페스티벌로 1년을 먹고 살지요. 아시아인의 참여도 상당합니다. 아시아네트워킹만 잘되면 제주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지요. 일정 시간 꾸준히 감수해야 하는데, 아직은 배짱있는 분들을 못만났다”고 말했다.

그의 춤에 대해 ‘더 유연하고 더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내놓자 그는 “저보다 더 창의적이고 유연한 분들이 많아요”라며 말을 아끼고는 피핑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작품의 100회 공연을 끝낸 다음이었어요. 너무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눈물이 막 나오는 거예요. 리허설까지 합하면 200번을 한 공연인데, 적어도 한번은 완벽하고 싶었는데. 그때 안무자 가브리엘라 카리조가 ‘완벽이란 단어 자체가 공연에서 존재하지 않아’라고 얘기를 듣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춤을 춘지 이제 27년이 됐는데, 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현재진행형’으로 봐주세요. 그게 김설진입니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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