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로맨스를 추억해보자
제주의 로맨스를 추억해보자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8.3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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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 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논설위원

[제주일보]  #장면1. 1952년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38살 때였다.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러니까 가정과 명예와 국문학과 교수의 자리도 뒤로 한 채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 어디로? 얼마 동안 시간이 지나서 박목월의 본처는 남편이 제주도에서 딴 여자와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부인은 남편을 찾아 나서 둘과 마주하게 됐다. 부인은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느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잘 지내라고 두 사람의 옷을 내밀어 주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부산에서 여인의 아버지(당시 목사)가 와서 딸을 설득을 했고, 사흘을 버티다 이별을 선택한 박목월 시인의 여인은 부친 손에 이끌려 제주항을 떠났다.

박목월과 여인은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에서 6개월여 살았다. 여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여관근처 교회에 나갔다. 여인은 몸이 자주 아팠는데 그때마다 박목월은 여인을 업고 병원에 갔다고 한다. 교회에서 시낭송회가 자주 열렸는데 여인은 박목월 옆에 앉아 있었다. 결국 사랑의 도피는 끝나고 여인이 부산항으로 떠나자 가슴 아파한 박목월은 이때 ‘떠나가는 배’라는 시를 썼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터져나오라 애 슬픔 물결 위로 한된 바다/울부짖는 고동소리 님이여 가고야 마느냐.’

이 시뿐만 아니다. 제주도에 있을 때 박목월은 ‘이별의 노래’를 지었는데 김성태씨의 곡으로 널리 알려진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바람이 싸늘이 불어 가을은 깊었네/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둘 다 사랑이 절절히 담긴 내용이다.

#장면2. 조정철은 1775년(영조 51)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별검(別檢)이 됐다가 2년 뒤 정조 시해 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됐다.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를 사랑하게 된다. 제주시 애월읍 금덕리는 거문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 금덕 남쪽에 홍의녀묘(洪義女墓)가 있다. 향리 홍처훈(洪處勳)의 딸 윤애(允愛)의 무덤인데, 주인공 홍윤애와 조정철의 슬픈 사랑이 서린 무덤이다.

둘은 1781년 위기가 찾아왔다. 조정철 집안과는 조부 때부터 원수지간이었던 소론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해온 것이다. 원수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정철을 없애기 위한 단서를 찾고자 홍윤애를 데려다 문초를 했지만 그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다가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조정철은 이때 상황을 떠올려 ‘어제 미친 바람이 한 고을을 휩쓸더니 남아 있던 연약한 꽃잎을 산산이 흩날려 버렸네’라는 시를 썼다. 조정철은 1805년 유배가 풀렸고 순조 11년인 1811년 6월에 제주방어사를 자원했다. 부임 즉시 어렸을 때 헤어진 딸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 홍윤애의 혼을 달래고자 무덤을 찾아 ‘홍의녀묘’라고 비를 세운 뒤 묘비에 절절한 사랑의 글을 썼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황천길은 멀고 먼데 누굴 의지해서 돌아갔는가/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영원히 아름다운 이름, 형두꽃처럼 빛나리~.’

가을이다. 로맨스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제주는 원래 낭만과 사랑이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너무 배타적이라고도 한다.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계절에 좀 더 사랑의 눈길로 그들을 대해보는 것은 어떨까. 제주도는 아름다운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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