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발언대 '오븐'과 '빅런치'
주민발언대 '오븐'과 '빅런치'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8.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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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 제주특별자치도 도시재생지원센터 사무국장

[제주일보] 서울지역에서 종종 도시락 미팅이 열린다. ‘빅런치(the big lunch)’라는 이름의 모임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는다. 특별한 주제도 없다. 만나서 밥 먹는 게 모임의 목적이다.

이 빅런치는 영국에서 시작된 도시재생프로젝트 중 하나다. 2009년부터 시작되어 7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후 이를 본받아 서울이나 주요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빅런치는 참석자들이 각자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어울려 먹는다. 포트럭(여러 사람들이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 와서 나눠 먹는 식사) 파티의 형식이다. 자신이 가지고 온 음식을 공유하며 관계를 맺어가는 네트워킹의 새로운 방식이다.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함께 얼굴 보고 밥 먹는 일부터 시작해 보자는 취지다.

‘밥정’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계속해서 만나 밥을 먹게 되면 쌓이는 정이 그 어떤 목적을 지닌 관계보다 더 끈끈하다는 이야기다.

지난 24일 구 제주대병원이 변신한 예술공간 ‘이아’에서도 도시락 미팅이 진행됐다. ‘길의 기억찾기_삼춘들 그 길 이야기를 고라줍써’라는 제목으로 원도심에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다.

이 자리는 새롭게 시작된 주민소통 프로그램이다. 이름하여 주민발언대 ‘오븐’. 도시락 미팅을 비롯해 벌써 3번째 발언대가 열렸다. 오븐에 굽듯이 주민들의 생각을 구워 내서 구체화하고 가능하면 정책에 반영하자는 의미와 5분간만 발언하자는 의미를 동시에 담았다.

어느 주제에 대해 발언할 기회를 갖다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으며 이로 인해 타인의 의견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틀리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오븐’은 다양한 사안에 대해 내가 옳고 남이 그르다는 판단보다는 나와 남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협상의 가능성을 열자는 의미 또한 지녔다.

더불어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행정에서도 알아줬으면 하는 의도도 담고 있다. 그 때문에 결과에 대한 기록을 가감없이 담아 관계자들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오븐의 진행은 오븐기획단이라는 주민 모임이 기획하고 진행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도시재생센터의 이름이 들어있으니 당연히 센터가 진행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누군가 어떤 행사를 하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 행정이나 관계기관에 의해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틀이 마련되어 있다거나 주제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른 측면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역의 이슈를 주민들이 앞장서 먼저 이야기하고 해결 방안들을 찾아나서는 작업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의미있는 지역활동이라는 사실이다. 그같은 활동이 제주시 원도심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솔직히 기대와 우려가 함께 섞여 있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는 빅런치같이 모르는 사람들이 밥 먹기 위해 만나는 모임은 낯설기 그지 없다.

또 타인의 의견과 다름을 인정하며 자신의 생각만을 피력하는 발언도 쉽지 않다. 그러나 주변의 사소한 이야기부터라도 혹은 소소한 주제라도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면 좋은 방법, 혹은 새로운 방법이 생겨날 수도 있는 일이다. 도시락을 먹는 일은 중요하다. 또한 생각이 옳고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도 어렵다.

앞으로도 ‘오븐’은 계속될 예정이다. 도시락 먹으며 이야기하는 기회도 늘어날 것이고 소소한 주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그와 더불어 빅런치처럼 주제없이 도시락을 먹으며 얼굴을 익히고 이야기를 나누는 네트워킹이 좀 더 자연스럽게 열렸으면 좋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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