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잎 국
호박잎 국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8.2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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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제주일보] 연이은 폭염에 지칠 대로 지쳐 겨우 숨쉬기 운동만 한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구절이 나도 모르게 절로 나온다.

예전에는 손님이 온다든가 제사가 있는 날에만 에어컨을 켰는데 올해는 계속되는 폭염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다.

전기 요금 걱정은 나중으로 미루고라도 산 사람은 살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밖에서 들어오자마자 바로 에어컨부터 튼다.

집 안에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주부인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시도 때도 없이 때가 되면 울리는 배꼽시계다.

평소에는 요리해서 나눠 주는 즐거움으로 살았는데 더위에는 바로 백기를 들고 만다. 누가 빨리 배고픔을 채워주는 알약을 개발해줬으면 싶다.

입맛도 없고 운동도 하기 싫고 만사 귀찮아 하는 딸이 안쓰러웠는지 어머니가 호박잎을 봉지 가득 넣어 주신다.

온 가족이 둥근 밥상에 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밥을 먹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 왔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어머니가 따로 챙겨 주신 고등어 구이를 조금만 드시고는 슬쩍 딸들 앞으로 내민다.

호박잎 국은 따뜻할 때 먹어도 맛있지만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밥에 말아 김치를 얹어 먹어야 제맛이다. 이미 입 안에 침이 고인다.

호박잎 국의 별미는 밀가루를 묽게 반죽해 숟가락으로 떠넣은 수제비에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밀가루도 귀했던 시절이여서 수제비는 운이 좋아야 숟가락에 놓여 있곤 했다. 꽁꽁 숨겨 놓은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가족을 떠올리며 수제비를 듬뿍 넣고 호박잎 국을 준비했다. 아무 말 없이 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 뚝딱 비우고는 최고의 칭찬을 기대하는 나에게 남편이 한 마디 건넨다.

“예전에 먹었던 맛이 아니야.”

MSG를 넣을 걸 그랬나 잠시 후회도 해본다.

하지만 ‘이 나이에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사람도 많다는데 예전 맛을 기억하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하며 섭섭한 마음을 다독인다.

이왕 땀 흘리는 거 호박잎 한 냄비 가득 끓여 친구를 불러야겠다. 여름이 가기 전에 매미소리 들으며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벙근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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