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정상”…에베레스트에 우뚝 선 제주인
“여기는 정상”…에베레스트에 우뚝 선 제주인
  • 현봉철 기자
  • 승인 2017.08.27 1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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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보며 꿈 키운 산악인 고상돈…고향 제주에 기념관조차 없어
1979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 등정 중 랜딩포인트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대원들(왼쪽부터 해리 마링가스, 이일교, 고상돈, 주영, 박훈규).

[제주일보=현봉철 기자] “여기는 정상,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1977년 9월 15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정상에 한 사나이가 섰다. 제주 출신 산악인 고상돈(1948~1979). 한국 산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 세계에서 56번째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산악인. 그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2년 뒤 북미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를 정복하고 하산하다 조난당해 숨졌다. “나는 가야 하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 몸을 전율시켰다. 정상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영원한 산사나이가 되었다.

▲한라산을 보며 키운 산악인의 꿈=고상돈은 1948년 12월 28일 제주시 칠성통에서 5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제주북국민학교에 입학해 4학년 1학기 까지 제주에서 생활을 하다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올라간 충청북도 청주에서 주성국민학교와 청주중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 청주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고상돈은 1967년 고교 졸업과 동시에 충북산악회에 정식으로 가입해 산악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후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매년 열린 에베레스트 동계훈련에 참가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고상돈은 마침내 에베레스트 등반대원에 선발됐다. 또 제주산악회 명예회원으로 위촉돼 제주 산악인으로서 인정받게 된다.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제주산악회 깃발을 들고 기념촬영하는 등 늘 제주를 생각하는 제주인이었다.

어린 시절 구름에 뒤덮인 한라산을 보며 품었던 막연한 꿈을 실천해가는 과정이었다. 훗날 고상돈은 산은 가장 좋은 안식처였고, 의지력의 시험장이었다고 말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산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마침내 정상, 그리고 새로운 도전=고상돈은 1977년 9월 15일 오전 5시 30분에 캠프5를 출발해 7시간 20분간의 사투 끝에 낮 12시 50분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섰다.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고상돈은 그러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1979년 박훈규 부대장, 이일교 대원과 함께 북미 최고봉 매킨리 등정에 나서 5월 29일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고상돈은 하산 도중 이일교와 함께 추락해 숨졌고, 제주산악회 박훈규 부대장은 중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고상돈은 어린 시절 산악인의 꿈을 키워 준 한라산 1100고지에 묻혔다.

▲잊혀진 영웅=9월 15일은 산악인의 날이다.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대한산악연맹이 지정했다.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개발독재라는 정치상황에 이용됐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한국인의 도전정신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줬고, 훗날 한국 산악을 이끌어 갈 故 박영석, 엄홍길 등의 후배 산악인들에게는 산에 대한 꿈을 갖는 계기가 됐다.

당시 고상돈은 한국 최고의 영웅이었다. 그의 얼굴이 담긴 기념우표와 주택복권, 기념담배까지 출시됐고, 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던 한국을 대표하는 제주 출신의 산악인 고상돈은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좌측)1977년 9월 15일 낮 12시50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선 고상돈, (우측)고향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진 제주시가 퍼레이드

▲고상돈 산악기념관은 언제쯤=2010년 1100도로의 일부 구간인 어승생삼거리에서 서귀포시 옛 탐라대 입구까지를 ‘고상돈로(路)’로 지정했고, 고상돈기념사업회에서는 매년 11월 ‘고상돈로 전국걷기대회’를 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고상돈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일본인 최초로 1970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우에무라 나오미의 경우 그의 고향인 효고현과 도쿄도 이타바시구에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관이 있다.

히말라야 8000m급 16개 봉우리를 등정한 엄홍길은 고향인 경남 고성군과 경기 의정부시에 기념관이 있다.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영석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기념관이 있지만 정작 이들에게 산악인의 꿈을 키워 준 고상돈의 기념관은 여태까지 없다.

현재 고상돈이 생전에 사용하던 등산장비와 등정사진, 에베레스트 정상의 암석, 상패, 훈장증서 등 유품 674점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들 유품들은 기념관이 설립돼 옮겨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1979년 고상돈과 함께 매킨리 등정에 나섰던 제주산악회의 박훈규씨는 2004년부터 고상돈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박 이사장은 “고상돈은 산에서 술·담배를 일절 하지 않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혼자 매일 체력훈련을 하는 등 자기관리가 철저했다”며 “성실함과 책임감에 바탕을 두고 끊임없는 훈련을 했던 그였기에 에베레스트가 정상을 허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제주인,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전 세계에 알린 고상돈을 지금 누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느냐”며 “그의 고향이자 한라산을 보며 산악인의 꿈을 키웠던 제주에 기념관이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이사장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상돈이를 우리가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기억해주나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제주 사람이잖아요.”

현봉철 기자  hbc@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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