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연인과 말끔히 차려입고 추억 남겼던 특별한 장소
가족·연인과 말끔히 차려입고 추억 남겼던 특별한 장소
  • 고현영 기자
  • 승인 2017.08.22 1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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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제주 첫 사진관 ‘영주사진관’ 등장…광복 이후 ‘전문 사진기사’ 채용 변화 바람
1960년대 제주시 원정로 거리 풍경으로 동문로터리 부근에서 서쪽을 향해 찍은 모습. 나사로병원 간판 밑으로 DP점 간판이 보인다. <제주도 제공>

[제주일보=고현영 기자] “오른쪽 어깨를 살짝 앞으로~에이, 너무 틀었어. 조금만 뒤로 빼시고…좋습니다. 고개는 왼쪽으로 살짝만 기울여 주세요. 그렇지. 그 자세로 스톱. 움직이지 마시고.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찰칵)”

하얀 배경을 뒤로 하고 판에 박힌 듯한 포즈로 앉아 어색한 미소를 띄고 있는 모습들. 사진관에 가야만 볼 수 있었던 진풍경이다.

현대사회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진화하는 디지털 카메라며 해상도 좋은 휴대전화가 보편화돼 있어 장소 불문 무엇이든 앵글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증명사진을 비롯한 가족사진, 우정의 징표를 남기기 위한 친구들과의 추억 사진, 커플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사진관을 직접 찾아 주인이 요구하는 포즈를 취해야만 했다. 당연히 촬영 전 사진기사의 포즈 시연은 ‘덤’이었다.

제주에서 영업 사진이 시작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이다. 한일합방 이후인 이 시기에는 일자리를 찾아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입국 증명서에 본인임을 입증할 사진이 필요했다. 당시 제주에서 도항사진(여권사진) 찍기를 전업으로 한 사람은 일본인 ‘기무라’였다. 그는 제주시 동문통 동척회사(東拓會社, 제주주정공장) 관사에 거주하며 마당·운동장 등 야외에서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집안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규모 있는 사진관이 없었기 때문에 사진 현상을 위해서는 암실을 갖춰야만 했다. 원로 사진 작가 김광추와 취미활동으로 사진을 찍었던 박영훈(전 제주도립병원장), 한중옥(조흥자동차회사 설립자) 등이 당시 집안에 암실을 마련해 놓고 사진을 제작했던 대표적 인물들이다.

1950년대 현대식 결혼식 출장 사진 촬영. 신랑·신부를 중심으로 친구와 친지들이 신랑집 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주도 제공>

제주 최초의 사진관은 1932년 제주읍 원정통(현재 우리은행)에 개관한 영주사진관(대표 전석진)이다. 이곳은 결혼·졸업·도항사진의 촬영을 거의 도맡았으며 특히 제주북초등학교의 졸업사진은 전담했다. 제주 사진계 초기 개척자인 고명수가 일본으로 가기 위한 도항사진도 이곳, 영주사진관에서 찍었다.

1935년 영주사진관 맞은편에 OK사진관이 들어섰고, 광복 전까지 제주읍 남문통에 흥아사진관이 있었다.

일본에서 사진 수업을 마친 고명수는 1939년 귀국해 제주읍 서문통에 조일사진관을 개업한 후 1947년 문화사장(文化寫場)으로 상호를 바꿨다.

광복 후에도 새로운 사진관들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사진관 내부에는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대부분의 사진관들이 전문 사진기사를 채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제주읍 남문통에 자리한 서울사진관은 출장 촬영과 4절 확대판을 현상하는 전문 사진관임을 내세우며 사진관의 또 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백조사진기점은 촬영에서부터 현상 재료 및 사진기를 매매한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이 즈음 문화사장을 운영하던 고명수는 칠성통으로 확장·이전해 월광사로 상호명을 다시 바꿨다. 남문통 입구에는 중앙사장(대표 김지윤)이 개업했는데 이곳은 예식장 운영까지 겸업해 당시 도민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단지 사진만 찍어내던 공간이 이벤트와 접목하며 도민들에게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하는 순간이었다.

바통을 이어 1950년대 말에는 스타예식장 등이 예식장 겸용 사진관 전략으로 호황을 맛보기도 했다.

큰오빠와 함께 광주수피아여고에 입학하기 위해 출항하기
직전 선상 위에서 찍은 한정숙 여사(사진 오른쪽)의 학생 때 모습
-‘한중옥 한정순 남매가 찍은 1930년대의 사진들’.
<독자 김창근씨 제공>

이밖에도 제주시 칠성통에는 대영사장(칠성다방 2층, 1953년), 미미사진관(1953년), 0번사진관(관덕정 옆), 라이카사(1960년)가 신설됐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필름을 맡기면 현상·인화·확대 등을 전문적으로 해 주는 DP점(developing&printing)이 속속 생겨나며 스튜디오 사진관들은 덤핑 경쟁이 치열해졌다.

흑백사진은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민낯과도 같다. 꾸미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자체가 전부여서 순수하고 진솔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사진관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순간순간 걸어 온 삶의 기록이다. 더디게 돌아서 가더라도 앞서 걸어간 이들의 자취를 천천히 돌아보는 ‘아날로그 감성’이 필요한 때이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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