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코드'와 대중민주주의
'서민 코드'와 대중민주주의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8.2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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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서민’의 시대라고 한다. 대통령의 정책도 친(親)서민이고 도지사의 행보(行步)도 선(先)서민이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철폐에서부터 제주시 행복주택까지 정책이나 행보가 서민이 아닌 게 없다. ‘서민 주거안정’, ‘서민 의료지원’, ‘서민 맞춤형 복지’ 등 온통 서민에 가까이 가고자 하고 서민이 우선이다.

지금 우리사회의 권력이 빠른 속도로 엘리트 계층에서 촛불 대중에게로 이전되면서 나타난 대중민주주의 정체(政體)에서 불가피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심하게는 ‘서민=정의(正義)’라는 민심의 표출마저 읽힌다. 한마디로 ‘서민 코드’가 열쇠를 쥔 사회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 특혜에 분노했던 촛불 대중은 서민이었다. 가진 것이 없고, ‘빽’ 없다는 이유로 강자들로부터 핍박받고 사회의 주류(主流)에서 소외돼왔다고 느껴온 사람들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은 사실 서민 사회의 예고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민, 서민하면서도 서민의 구체적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서민이라는 말이 원래 뜬 구름같은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불가시성(不可視性)이 서민의 특징이다. 서민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다. 내세울 것도 없고 하는 일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선거철만 되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시권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서민의 기준은 무엇인가. 중산층이나 빈곤층은 학술적 정의가 나와 있다. 그러나 서민과 비서민을 가르는 경계는 불투명하다. 빈곤 계층을 지칭하는지, 거기에 중산층을 더한 것인지, 합의된 정의가 없다. 국어사전을 보니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나와 있다.

경제에는 ‘중위 소득’이란 개념이 있다. 전체 가구 중위 소득 기준으로 50%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을 말한다. 그러면 이런 중위 소득 이하 계층을 말하는 건가?

▲원래 ‘서(庶)’는 ‘다양하다’는 뜻도 있지만 용례를 보면 중심 또는 원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본처 자식이 아닌 서출(庶出)이나 비슷해 보여도 진짜는 아닌 서기(庶幾)라는 말이 그렇다. 사회나 집단의 주류를 은연중에 설정해놓고 거기에 끼지 못하는 부류를 일컫는 것이다. 속된 말로 ‘끗발’에서 밀리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그런 끗발의 근원을 권력과 부(富)라고 할 때 거기에서 배제된 사람이 서민인 것은 맞다. 미국 오버린대학의 전 총장 로버트 풀러는 총장 당시 많은 이들이 그를 강연에 부르고 부탁을 해오고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총장자리에서 물러나 아무런 직책이 없게 되자 점차 자신의 존재가 잊혀져서, 아무 존재가 아닌 사람, 즉 노바디(nobody)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책, 특별한 사람 ‘섬바디(somebody)’와 별 볼 일 없는 사람, ‘노바디(nobody)’ 이야기다. 이런 섬바디와 노바디 기준이 서민과 비서민의 기준이 될까?

로버트 풀러 총장은 그런 차이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했다. 문제는 섬바디가 지위와 명예에 따르는 희생과 절제를 지키지 못하고 남용과 차별을 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다.

▲보건복지부가 통계청의 가계 동향조사를 토대로 산정한 2017년 중위 소득은 4인 가구 기준으로 월 477만원이다. 연간소득으로 합산하면 5724만원이다. 이 소득 이하를 서민으로 생각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한 경제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나는 저 소득층’이라는 비율이 50.1%나 됐고, 고소득층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고작 1.9%에 불과했다. 거의 전국민이 ‘나는 서민’이라고 하고 있다.

정부와 제주도가 국민의 대다수인 ‘서민’을 살리겠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을 앞세운 ‘말 폭탄’이라면 곤란하다. 역대 정권들이 지방선거나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목적으로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너도나도 ‘서민 코드’를 맞추다가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기지 않았던가.

대중민주주의가 지나치게 고삐가 풀리면 자칫 중우(衆愚)정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서민정책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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