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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 되어보기강은숙 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 / 숙명여대·가천대 외래교수
제주일보 | 승인 2017.08.08

[제주일보]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를 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산목 편에 나오는 '빈 배'

장자의 글이 떠오르는 날은 사뭇 힘든 날이다. 갈등 수준이 높은 당사자들이 이혼 소송을 하며, 자녀를 자신이 키우겠다고 양육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녀 입장에서 과연 누가 바람직한 양육자 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 -법원에서 행해지는 가사상담-을 진행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로가 뿜어내는 갈등의 열기는 뜨겁다. 이 길에서도 홀연히 장자의 빈배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신의 양육의지를 주장하며 이젠 서로 세상의 가장 먼 사이가 되어 으르렁 거리는 소송 중의 부부, 그 갈등의 중심에서 중재를 하다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 그리고 상처가 참으로 높고 깊음을 느끼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상태에서는 부정적인 것만 보이고 그 감정만 고스란히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면

똑같은 상황을 서로 겪었음에도 서로의 기억은 아주 다르다. 도저히 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특히 부정적인 정서가 부부사이를 지배하게 되면 갈등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지면서 나중에는 그 갈등이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소리치고 욕하고, 거칠고 사납게 된다. 사실 거칠고 사나울수록 속은 약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 약함을 숨기려 점점 더 싸우게 된다. 결국 내 자신을 향해 상처를 입히게 된다. 부부 사이 부정적인 정서가 지배하는 경우 다음과 같은 모습들을 보인다.

▲상대방이 처음 한 행동에도 “저 사람은 늘 그렇다”고 일반화 시킨다.

▲자신은 피해자이고, 상대방은 가해자이며 모든 일은 상대방 때문에 일어났다는 피해의식과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신경질 적이 된다.

▲상대방이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대화 거부, 생활비 주는 것 거부, 밥상 차리기나 빨래 거부, 성관계 거부 등 상대방을 벌주기 위한 행동을 한다.

결국, 대화는 단절되고 상대방의 모든 행동은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로에게 분노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마치 자신의 꼬리를 물고 그 자리를 빙빙 맴도는 꼴이다. 분노가 바이러스처럼 전염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덧 누가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는지 불분명하게 되면서 갈등은 광속도로 뻗어나가 아주 힘이 센 괴물체가 된다. 이제 갈등이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처음에는 ‘상대방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른다. 내가 말해봐야 소 귀에 경읽기라 나만 열받게 된다’는 생각으로 참는다. 그러다 결국 폭발하게 된다. 그 폭발이 가정 폭력일 수도 있고 부정행위 일 수도 있고 가출이 될 수도 있다.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부부에게 진정을 시킨후 정말로 서로에게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냐고 물어보면 “따뜻한 아침 밥상, 내가 힘들 때 위로해주기” 이 정도이다. 화가 난 모습은 커다란 바이러스 덩어리 같은데 사실 속내는 , 그 속내에 들어있는 바램은 정작 몇가지 되지 않는 여리디 여린 작은 것들이다.

이 몇가지 되지 않는 바램을 왜 서로는 채워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상대방을 향해 찾지만 사실 열쇠는 내 안에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는 자존감, 자존감이 든든하게 채워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이 갈등의 해결책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눈보다는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애쓰기 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높인다. 비난에도 스스로를 위로하는 힘이 있다. 글 머리에 썼던 장자의 글에서도 빈 배였다면 화내지 않고 슬그머니 돌아 갔을 거라고 이야기 했듯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너그러울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존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 주양육자와의 관계에서 건강한 애착을 형성하였을 때’라는 의견이 공통적이다.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태어난 존재만으로, 살아있다는 것 만 으로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관심을 받은 아이는 자존감을 가지게 된다.

또 다른 연구로는 어린시절에 뜻하지 않게 건강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였어도 스스로 잘 살고 있다거나, 가식적인 욕망을 줄이면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결과도 있다.

갈등이 꼬리를 문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무엇 하나 잘 해결하지 못한다는 스스로를 향한 비난의 소리가 밀려들 때 큰 호흡으로 잠시 장자의 빈배 이야기를 살짝 생각해 보자.

제주일보 기자  isuna@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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