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과원, 380여 년 존속…약용작물재배단지 기능 겸해
제주 과원, 380여 년 존속…약용작물재배단지 기능 겸해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7.2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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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제주 과원의 설치와 그 성격(11)
고원방고(‘탐라순력도’ 수록 화폭)-제주목사 이형상 일행의 염둔 과원과 옛 왕자터 방문 모습을 그린 것.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 사람은 조선 초기부터 감귤류 열매의 상납물량을 채우는데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폐해가 감귤나무를 잘 심지 않고, 심지어 뽑아버리는 일도 일어날 정도에 이르렀다. 정부도 국가적 소요에 요구되는 감귤류 열매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책을 마련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제주 과원의 성격 변화로 이어졌다. 또한 제주 과원은 감귤류 열매의 공급처 외 관점에서도 바라봐야 한다.

제주는 1455년(세조 원년) 이전부터 공립적 성격의 과원이 설치·운영돼 나아갔다. 이것이 1526년(중종 21)부터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제주목사 이수동이 감귤 상납으로 야기되는 민폐를 없애기 위해 방호소(防護所), 곧 진(鎭)이 자리한 곳에 각각 과원을 설치해 감귤류 나무를 옮겨 심었던 것이다.

이들 방호소는 별방(구좌읍 하도리), 수산(성산읍 수산리), 서귀(서귀포시 송산동), 동해(서귀포시 대천동 내 월평동), 명월(한림읍 동명리)의 5곳이다.

또한 방호소 소속의 군인에게 감시·보호 등의 일을 겸하게 했다. 이때부터 과원의 관리도 체계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이들 5곳 과원은 종전에 운영됐던 과원과는 달리, 국립적 성격을 띠었거니와, 국립 제주 과원의 시초라 하겠다.

국립 제주 과원은 각 과원에 책임자로서 감관(監官), 과원지기로 직군(直軍), 혹은 과직(果直) 등을 뒀다.

제주목사 조정철은 1811년(순조 11) 제주목 관할의 12개소 과원마다 과직·감고(監考)·수고(首考) 각 1인을 배치했다고 한다.

당시 과원은 모두 돌담으로 둘러싸였고, 둘레에 방풍림으로 대나무를 심었다. 감귤을 따 저장할 때는 대나무 잎사귀를 바닥 깔개로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국립 제주 과원은 감귤류 나무 말고도 다른 것들도 함께 재배됐다. 그것의 상당수가 약용작물이었다.

1653년(효종 4) 편찬의 ‘탐라지’를 보면, 제주의 37곳 과원마다 자라고 있는 감귤류의 12품종 나무와 그 수효도 낱낱이 기록돼 있다.

이밖에 뽕나무·비자·멀구슬나무·메밀잣밤나무 등 17품종의 나무도 식재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감귤류 품종과 함께, 약용작물에 해당한다.

국립 제주 과원은 감귤류 외의 약용작물도 재배·공급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일본사에 각각 나오는 약원(藥園)·어약원(御藥園)과 같은 존재를 연상케 한다. 곧, 제주 과원은 약용작물재배단지로서의 기능도 겸했던 곳이라 하겠다.

국립 제주 과원이 들어섰던 곳은 기록을 통해 추적도 가능하다.

우선, 앞서의 ‘탐라지’를 보면, 제주 삼읍의 각 지역에 산재한 37개소 과원의 명칭과 소재처가 나온다. 이들 가운데 몇몇의 구체적 명칭과 현 위치를 보면, 제주목 소속으로는 제주시 중앙로 일대 ‘南果園’(남과원), 아라동 산천단 아래 ‘小林’(소림), 정의현 소속으로는 남원읍 하례2리 금물 일대 ‘禁物’(금물), 서귀포시 호근동 동쪽 원통 일대 ‘元通’(원통), 대정현 소속으로는 서귀포시 대천동 내 영남동 일대 ‘羔屯’(고둔)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37개소 과원 중 4곳을 빼고는 전부 현 위치까지도 알 수 있다.

국립 제주 과원은 때에 따라 변화해 나아갔다. 총수의 경우는 역시 앞서의 ‘탐라지’에는 37개소, 1704년 편찬의 ‘남환박물’에는 42개소로 늘어났음이 드러난다.

이어 1840년대 편찬의 ‘탐라지초본’에는 제주목 43·정의현 7·대정현 6개소의 도합 56개소, 1954년 편찬의 ‘증보탐라지’에는 제주목 47·정의현 8·대정현 7개소의 도합 62개소로 계속 늘어났음이 확인된다.

또한 과원의 명칭과 소재처도 기록됐다. 국립 제주 과원이 시기에 따라 소재처를 달리하면서 제주의 60여 곳에 설치·운영된 데는 감귤류 나무 등이 잘 자라는 곳을 시의적절하게 택해 과원을 설치한 점이 크게 작용했을 듯싶다. 이는 감귤을 오랫동안 재배하다가 지력(地力)이 소모되면, 기존의 과원을 폐원하고, 감귤나무가 잘 자라는 다른 곳에 새로운 과원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국립 제주 과원은 18세기 후반 이후 점점 쇠퇴해 갔다. 감귤 생산량의 격감과 세금의 금납화 등 때문이었다.

감귤 생산액이 1780년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하고, 19세기 전반부터는 감소화가 더욱 본격화됐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과원직, 곧 국립과수원지기는 일이 너무나 힘들고, 가산탕진할 정도의 처벌도 받았기에 그들의 피역과 도망이 잦아져서였다. 게다가 1801년 공노비 해방으로 과원직을 충당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대동법(大同法)이 18세기 초반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이로써 중앙정부가 종전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뒀던 현물을 시장구매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제주 감귤의 경우는 제주의 말과 소, 전복, 말총 등등과 함께, 계속 현물로 상납됐다. 제주 과원은 18세기 초반 이후에도 계속 존속해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던 중 시장경제와 화폐경제가 점차적으로 활성화됐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의 시행으로 현물납세제가 화폐로 납부하는 금납제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제주 과원도 역사적 기능을 상실했다고 하겠다.

결국 국립 성격의 제주 과원은 1526년(중종 21)에 처음 생긴 이후 380여 년 동안 존속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국립 제주 과원과 그 터의 존재는 제주가 ‘귤의 고장’으로서 역사적 연원이 깊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역사유적이다.

또한 제주 과원은 한약에 쓰던 약용작물도 재배한 약용작물재배단지로서의 기능도 지녔다. 이는 오늘날에 와 제주가 한의약산업 육성을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과도 맥락이 닿는 듯 싶다.

그런만큼, 국립 제주 과원 가운데 오늘날에도 그 위치와 흔적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는 곳을 찾아내 원래의 모습으로 정비하는 한편, 과원이 갖고 있는 오늘날의 의미도 곁들여 생태공원으로 조성해볼만 하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애초 국립 제주 과원이 지녔던 약용작물재배단지로서의 기능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감귤 생태공원은 앞으로 더욱 더 규모가 커져 나아갈 실버산업과 아울러, ‘장수마을’ 제주를 이미지화하는 것의 디딤돌이자, 견인차로서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약가공 언제부터 이뤄졌나 - 5세기 '뇌공포자론'서 체계화 시작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앞으로 진피 가공의 이유와 그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이에 앞서 한약 가공의 내력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겠다.

최초의 약물지(藥物志), 곧 ‘신농본초경’을 보면, 약재도 가공하나 드물게 이뤄졌다고 한다. 이후 5세기 ‘뇌공포자론’에 와서는 한약 가공이 체계화됐다고 하겠다. 본서에는 약재를 정선·절제하는 수치(修治)와 함께, 약재에 보료, 곧 보조매개물을 더해 굽는 가공, 곧 포자(炮炙)란 가공방식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 방법을 합쳐서 수제(修製), 또는 포제(炮製)라 한다. 이어 약재 그 자체가 보료로도 사용돼 가공하는 방식, 곧 법제(法製)도 생겨났다. 이들 온갖 방식을 통틀어 제제(製劑)라 한다. 이는 약의 약리적 효과를 높이고자 이뤄지는 가공과정, 또한 그 결과물도 말하는 것이다.

제제의 경우도 발전단계를 거쳤다. 이는 현존 최초의 의서라는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의 ‘선명오기편(宣明五氣篇)’으로 시작됐다. 여기에 “다섯 가지 맛이 각각 작용하는 장기가 있는데 신 맛은 간, 매운 맛은 허파, 쓴 맛은 염통, 짠 맛은 콩팥, 단 맛은 비위에 영향을 미친다(五味所入 酸入肝、辛入肺、苦入心、鹹入腎、甘入脾)”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들 생리학적 논의가 제제 출현의 이론적 배경이 됐던 것이다.

다음은 12세기경 장위안쑤(張元素)의 ‘진주낭(珍珠囊)’에서 “병을 치료하는데 약을 끌고 가는 인경약(引經藥)을 같이 사용치 않으면 처방약이 제대로 그 효과를 잘 발휘할 수 없다”는 논의, 곧 ‘인경보사설’이 제기됐다. 이로써 한약은 인경약으로 인해 처방의 성능이 변화·강화되고, 더욱이 직접 병 부위에 도달되므로 발병의 원인을 찾아서 직접 치료할 수 있다는 근거도 제시됐던 것이다. 이는 제제의 이론적 기초도 마련됐음을 뜻한다. 그래서 한약 가공이 약재의 보관에만 그치지 않고, 치료에 효과를 증강시킬 목적으로도 행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인경약의 경우는 비록 대부분 주약(主藥)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약을 끌고 가는 보조작용도 한다. 게다가 인경약은 탕약에 타서 복용하거나, 혹은 알약·가루약 등의 복용 때 물 대신 쓴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약들이 치료효과를 높이는데 힘을 더한다. 이밖에 인경약은 부형제(賦形劑), 곧 복용을 쉽게 하거나 일정한 형태를 만드는 보료로도 기능한다.

이들 한약 가공의 내력은 꾸준히 이어졌고, 그것이 하나의 학설로서도 정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동의보감’과 진피 가공에도 계승·적용됐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진피의 제제에 대해 얘기하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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