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비평.아름다운 문장', 수험서 이상 가치 평가
'역사 비평.아름다운 문장', 수험서 이상 가치 평가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7.20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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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박의(東萊博議)
동래박의(東萊博議) 전4권 표지.

[제주일보] 조선후기 양반의 형식주의와 비인간적인 횡포를 풍자한 작품으로 유명한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兩班傳)에는 “오경(五更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 사이)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을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 보며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동래박의’를 줄줄 외어야 한다.”(연암집(燕巖集) 제8권 별집)는 구절이 나온다.

또 예로부터 설화로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 후기에 판소리와 소설로 정착된 것으로 보이는 '토끼전'에도 “‘동래박의’라는 책을 보니 '짐승이 미련하기가 물고기나 짐승이나 같다'더니 어족 미련하기 모족보다 더 하도다. 오장에 붙은 간을 어찌 출입하겠느냐?”(완판본 퇴별가)는 대목이 있다.

이렇듯 1745년(영조 21)이 시대적인 배경인 '양반전'이나 조선후기에 소설과 판소리로 유행했던 '토끼전'에도 등장하는 책이 바로 '동래박의(東萊博議)'이다. 18세기 중엽 조선의 사회을 풍자하는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이 책은 그만큼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래박의'는 중국 남송(南宋)의 대학자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168항목을 뽑아 각각 제목을 달고,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득실(得失)을 평론한 책이다. 모두 25권으로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또는 간단히 '좌씨박의'로 부르기도 한다.

여조겸은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시킨 주희(朱熹)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 학문적으로 주자(朱子) 못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대학자이다. 그는 주자와 함께 송학(宋學)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근사록(近思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저자 스스로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과거시험 대비용으로 만들어져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준비용 교본으로 많이 이용되었던 필독서였다. 18세기 유학자 김낙행(金樂行)의 구사당속집(九思堂續集)에는 “이 책이 천하에 유행하고 후세에 전해져서 소장하는 자는 보배로 여기고 외우는 자는 법으로 여긴다.”(夫行於天下 傳於後世 藏之者以爲珍 誦之者以爲法)는 구절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책이 가진 실용적인 과거 대비 수험서라는 의미 외에도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날카로운 역사 비평서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된 작문 지침서 등의 장점으로 인해 일반적인 수험서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조선의 선비들에게서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측면도 있다.

'동래박의'는 원래 25권 168항목으로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많이 유통되었던 것은 86항목만 발췌한 '동래박의'였다. 이렇게 원본보다 발췌본(拔萃本)이 유통되었던 이유도 편리하고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예언(例言 일러두기)에 밝히고 있다.

현대에는 보경문화사(1984)와 문연각(1988)에서 영인 출판했고, 번역본으로는 오재석의 '논술의 백미 동래박의'(중화당,1995)가 있다. 아직 완역되지는 않았지만 총 25권 중 1~10권까지 번역되어 출판된 전통문화연구회의 '역주 동래박의1·2(정태현·김병애 옮김,2012·2013)'도 있으니 이 책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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